차고 넘치는 박수와 환호성이 천장 없는 경기장을 메웠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이곳, 천하제일무술대회의 8강전 첫 경기가 막을 내린 참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중앙 무대 위에는 떡하니, 마치 방금 산책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강진우가 서 있었다.
“흐음… 싱겁군.”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장내에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뒤흔들던 흑호권(黑虎拳)의 맹주, ‘철갑맹수(鐵甲猛獸)’ 오만식은 지금 무대 한쪽 구석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전신을 강철처럼 단련했다는 그의 육체는 강진우의 발끝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강진우가 하품을 참으며 왼발 뒤꿈치로 대충 바닥을 긁는 척하다가 오만식의 발목을 ‘우연히’ 걸어 넘어뜨린 결과였다.
“크으… 역시 저 양반이야.”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었어. 저리 힘을 빼고 싸우는데도…”
“하지만 저건 좀 너무했지 않나? 하품을 하다가 이기다니.”
관중석에서는 경외와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강진우는 그런 시선들을 한데 묶어 대충 훑어보더니, 심판의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무덤덤하게 경기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야, 강진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통로 어귀에서 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 특유의 낭랑한 기세를 타고 강진우의 고막을 때렸다. 강진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꽃 같은 붉은색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니는 검집의 은장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소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마치 방금 맹수라도 사냥하고 온 듯한 기세였다.
“네놈은 정말… 무림 고수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냐?”
한소희는 혀를 차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강진우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글쎄, 무림 고수는 잠시 낮잠도 못 자는 모양이지? 난 방금 그 양반 맹호권을 쓰길래, 지루해서 하품하다가 그만… 실수로 걸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실수? 그게 네놈 필살기냐? ‘하품 걸려 넘어뜨리기’?”
한소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강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코앞에 섰다. 강진우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한소희도 한 기세 하는지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팽팽한 긴장감, 아니, 팽팽한 싸움닭 두 마리가 마주 선 듯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은 벌써 다음 경기 준비라도 마쳤나? 벌써부터 그렇게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옆에서 감히 숨이라도 쉬면 당장 베어버릴 기세로군.” 강진우가 삐딱하게 말했다.
“흥! 다음 경기 상대는 듣보잡이지만, 난 언제나 만전을 기한다. 네놈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나온 불량배와는 다르지.”
“불량배라… 허허, 네 녀석의 입은 여전하군. 독설로 천하제일이 되려는 모양이지?”
강진우가 콧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경기장 한쪽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한 종소리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끊었고,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군들, 잠시 주목해주시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무대 중앙에 나타난 천하제일무술대회의 총관, 백발의 노인 청풍대사를 바라봤다. 청풍대사는 늘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8강전에 예기치 않은 변고가 생겼네.”
변고? 강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소희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청풍대사를 주시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대회 경기장이 위치한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어젯밤부터 기이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 그 기운이 워낙 강성하여, 경기장 내부의 기의 흐름이 불안정해지고 있네. 특히 선수 대기실과 숙소 쪽은 아예 기의 흐름이 뒤틀려, 잠시 동안은 고수들이 편안히 수련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일세.”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림 고수들에게 기의 흐름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 수련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전투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회 본부에서는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네!”
청풍대사가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강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옆에 선 한소희도 침을 꿀꺽 삼켰다.
“남아있는 8강 진출자들은, 지금부터 경기 종료 시까지… 임시로 마련된 ‘합숙소’에서 지내야 할 것이네!”
합숙소?
강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무림 고수들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 합숙?
“더욱이, 기의 흐름 안정화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공간이므로, 각 방에는… 두 명의 고수가 함께 머물러야 하네! 이건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이니만큼, 제군들이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리라 믿네.”
청풍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는 폭발하듯 시끄러워졌다. 합숙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이와 한 방을 쓰라니! 무림 고수들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쓴다는 겁니까?!”
어느 문파의 장로가 소리쳤다.
청풍대사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자, 그럼 방 배정을 발표하겠네!”
강진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한소희 역시 왠지 모를 불안감에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 방! 운무도(雲霧島)의 비검사(飛劍士) 이정환 군과… 사자후(獅子吼)의 계승자 무광 스님!”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검과 주먹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청풍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강진우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설마… 설마…
“마지막으로…”
청풍대사의 시선이 강진우와 한소희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한 확신에 휩싸였다.
“‘태극검화(太極劍花)’ 한소희 양과… ‘만사태평(萬事太平)’ 강진우 군!”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억눌린 웃음소리와 탄식, 그리고 경악의 목소리들.
“뭐, 뭐요?!” 한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강진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젠장, 만사태평? 누가 나를 만사태평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태평할 수가 없잖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배정입니까, 대사님! 저, 저 불량배랑 저를 한방에 넣다니요?!”
“불량배? 네 녀석은 입에서 나오는 게 다 욕설뿐이냐? 나는 이 나이에 계집애랑 한 방을 쓰면 잠이나 제대로 잘지 모르겠군.”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노려봤다. 이글거리는 한소희의 눈빛과,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강진우의 미간.
“제군들, 이것은 대회의 엄숙한 결정일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네!” 청풍대사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못을 박았다.
잠시 후, 털썩이는 소리와 함께 강진우와 한소희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한옥 방 문턱에 도착했다. 방문 앞에는 ‘한소희-강진우’라고 단정하게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은 넓지 않았다. 작은 상이 놓여 있고, 양옆으로 요 두 채가 깔려 있었다. 방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은 한소희의, 오른쪽은 강진우의 공간인 듯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한소희가 씩씩대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강진우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보자마자 자신의 요가 깔린 곳에 허리춤의 검을 팽개치듯 던졌다. 강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어디 있나. 검은 검사의 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혼을 어찌하든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너나 네 혼 잘 간수해!”
한소희는 뾰족하게 받아쳤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강진우의 짐… 아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에 닿았다.
“그게 다 네 짐이냐?”
“그럼. 옷 몇 벌하고 칫솔, 그리고 내 꿀단지 하나면 충분하다.”
“꿀단지?! 네놈은 그렇게 대충 살아서 이 대회에 참가한 거냐? 기껏해야 사탕이나 빨아먹으러 온 아이놈도 아니고!”
한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진우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요 위에 보따리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고 싶군.”
그가 눈을 감고 팔베개를 하려는 순간, 한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야! 아직 밤도 안 됐는데 벌써 잘 생각이야? 방금 온 사람이 그렇게 누워도 되는 거냐?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피곤한데 뭐 어떠냐. 넌 잠도 안 자고 수행만 하는 로봇이냐? 그럼 넌 거기 서서 밤새도록 수행이나 하든가.”
강진우는 눈을 살짝 뜨며 한소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좁디좁은 방 안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출전한 두 고수는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합숙 생활은, 과연 평화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두 사람은 과연 하룻밤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이 방 안에는 왠지 모를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