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고 넘치는 박수와 환호성이 천장 없는 경기장을 메웠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이곳, 천하제일무술대회의 8강전 첫 경기가 막을 내린 참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중앙 무대 위에는 떡하니, 마치 방금 산책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강진우가 서 있었다.

    “흐음… 싱겁군.”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장내에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뒤흔들던 흑호권(黑虎拳)의 맹주, ‘철갑맹수(鐵甲猛獸)’ 오만식은 지금 무대 한쪽 구석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전신을 강철처럼 단련했다는 그의 육체는 강진우의 발끝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강진우가 하품을 참으며 왼발 뒤꿈치로 대충 바닥을 긁는 척하다가 오만식의 발목을 ‘우연히’ 걸어 넘어뜨린 결과였다.

    “크으… 역시 저 양반이야.”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었어. 저리 힘을 빼고 싸우는데도…”
    “하지만 저건 좀 너무했지 않나? 하품을 하다가 이기다니.”

    관중석에서는 경외와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강진우는 그런 시선들을 한데 묶어 대충 훑어보더니, 심판의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무덤덤하게 경기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야, 강진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통로 어귀에서 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 특유의 낭랑한 기세를 타고 강진우의 고막을 때렸다. 강진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꽃 같은 붉은색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니는 검집의 은장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소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마치 방금 맹수라도 사냥하고 온 듯한 기세였다.

    “네놈은 정말… 무림 고수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냐?”

    한소희는 혀를 차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강진우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글쎄, 무림 고수는 잠시 낮잠도 못 자는 모양이지? 난 방금 그 양반 맹호권을 쓰길래, 지루해서 하품하다가 그만… 실수로 걸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실수? 그게 네놈 필살기냐? ‘하품 걸려 넘어뜨리기’?”

    한소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강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코앞에 섰다. 강진우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한소희도 한 기세 하는지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팽팽한 긴장감, 아니, 팽팽한 싸움닭 두 마리가 마주 선 듯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은 벌써 다음 경기 준비라도 마쳤나? 벌써부터 그렇게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옆에서 감히 숨이라도 쉬면 당장 베어버릴 기세로군.” 강진우가 삐딱하게 말했다.
    “흥! 다음 경기 상대는 듣보잡이지만, 난 언제나 만전을 기한다. 네놈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나온 불량배와는 다르지.”
    “불량배라… 허허, 네 녀석의 입은 여전하군. 독설로 천하제일이 되려는 모양이지?”

    강진우가 콧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경기장 한쪽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한 종소리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끊었고,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군들, 잠시 주목해주시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무대 중앙에 나타난 천하제일무술대회의 총관, 백발의 노인 청풍대사를 바라봤다. 청풍대사는 늘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8강전에 예기치 않은 변고가 생겼네.”

    변고? 강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소희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청풍대사를 주시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대회 경기장이 위치한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어젯밤부터 기이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 그 기운이 워낙 강성하여, 경기장 내부의 기의 흐름이 불안정해지고 있네. 특히 선수 대기실과 숙소 쪽은 아예 기의 흐름이 뒤틀려, 잠시 동안은 고수들이 편안히 수련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일세.”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림 고수들에게 기의 흐름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 수련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전투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회 본부에서는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네!”

    청풍대사가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강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옆에 선 한소희도 침을 꿀꺽 삼켰다.

    “남아있는 8강 진출자들은, 지금부터 경기 종료 시까지… 임시로 마련된 ‘합숙소’에서 지내야 할 것이네!”

    합숙소?
    강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무림 고수들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 합숙?

    “더욱이, 기의 흐름 안정화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공간이므로, 각 방에는… 두 명의 고수가 함께 머물러야 하네! 이건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이니만큼, 제군들이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리라 믿네.”

    청풍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는 폭발하듯 시끄러워졌다. 합숙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이와 한 방을 쓰라니! 무림 고수들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쓴다는 겁니까?!”

    어느 문파의 장로가 소리쳤다.
    청풍대사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자, 그럼 방 배정을 발표하겠네!”

    강진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한소희 역시 왠지 모를 불안감에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 방! 운무도(雲霧島)의 비검사(飛劍士) 이정환 군과… 사자후(獅子吼)의 계승자 무광 스님!”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검과 주먹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청풍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강진우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설마… 설마…

    “마지막으로…”

    청풍대사의 시선이 강진우와 한소희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한 확신에 휩싸였다.

    “‘태극검화(太極劍花)’ 한소희 양과… ‘만사태평(萬事太平)’ 강진우 군!”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억눌린 웃음소리와 탄식, 그리고 경악의 목소리들.

    “뭐, 뭐요?!” 한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강진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젠장, 만사태평? 누가 나를 만사태평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태평할 수가 없잖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배정입니까, 대사님! 저, 저 불량배랑 저를 한방에 넣다니요?!”
    “불량배? 네 녀석은 입에서 나오는 게 다 욕설뿐이냐? 나는 이 나이에 계집애랑 한 방을 쓰면 잠이나 제대로 잘지 모르겠군.”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노려봤다. 이글거리는 한소희의 눈빛과,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강진우의 미간.

    “제군들, 이것은 대회의 엄숙한 결정일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네!” 청풍대사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못을 박았다.

    잠시 후, 털썩이는 소리와 함께 강진우와 한소희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한옥 방 문턱에 도착했다. 방문 앞에는 ‘한소희-강진우’라고 단정하게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은 넓지 않았다. 작은 상이 놓여 있고, 양옆으로 요 두 채가 깔려 있었다. 방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은 한소희의, 오른쪽은 강진우의 공간인 듯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한소희가 씩씩대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강진우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보자마자 자신의 요가 깔린 곳에 허리춤의 검을 팽개치듯 던졌다. 강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어디 있나. 검은 검사의 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혼을 어찌하든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너나 네 혼 잘 간수해!”

    한소희는 뾰족하게 받아쳤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강진우의 짐… 아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에 닿았다.

    “그게 다 네 짐이냐?”
    “그럼. 옷 몇 벌하고 칫솔, 그리고 내 꿀단지 하나면 충분하다.”
    “꿀단지?! 네놈은 그렇게 대충 살아서 이 대회에 참가한 거냐? 기껏해야 사탕이나 빨아먹으러 온 아이놈도 아니고!”

    한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진우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요 위에 보따리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고 싶군.”

    그가 눈을 감고 팔베개를 하려는 순간, 한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야! 아직 밤도 안 됐는데 벌써 잘 생각이야? 방금 온 사람이 그렇게 누워도 되는 거냐?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피곤한데 뭐 어떠냐. 넌 잠도 안 자고 수행만 하는 로봇이냐? 그럼 넌 거기 서서 밤새도록 수행이나 하든가.”

    강진우는 눈을 살짝 뜨며 한소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좁디좁은 방 안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출전한 두 고수는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합숙 생활은, 과연 평화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두 사람은 과연 하룻밤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이 방 안에는 왠지 모를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가상현실 게임 (VRMMO)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아르카나스 크로니클: 크레센트 학원의 그림자
    **에피소드 1: 지하의 속삭임**

    **[1컷]**
    **배경:** 드넓은 창공 아래, 거대한 마법진이 새겨진 흰색 대리석 건물들이 웅장하게 서 있다. 건물 사이로 빛나는 마나의 물결이 흘러다니고, 하늘에는 거대한 크리스탈 구체가 떠올라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다. ‘크레센트 마법학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아치형 입구가 보인다.
    **내레이션:**
    그곳은 마법의 정수가 흐르는 곳. 꿈과 희망,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지는 대륙 최고의 마법학원, 크레센트. 우리는 그 빛나는 이름 아래, ‘아르카나스 크로니클’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2컷]**
    **배경:** 학원 내부, 실습실. 투명한 마나 필드 안에 여러 명의 학생들이 각자의 룬 마법을 연습하고 있다. 류진은 땀을 흘리며 손가락으로 공중에 복잡한 룬 문양을 그리고 있지만, 문양은 이내 흔들리며 사라진다. 그의 옆에는 금발의 생기 넘치는 소녀, 아린이 팔짱을 끼고 서서 혀를 차고 있다.
    **류진:** (끙끙거리며) 아, 진짜!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마력 증폭의 룬’, 이론은 완벽한데 실전에선 영…
    **아린:** (피식 웃으며) 야, 류진. 너 그러다 학점 바닥 치겠다. 저번에 ‘불의 구슬’ 룬 그릴 때도 네 것만 시꺼먼 재가 됐잖아.
    **류진:** (발끈하며) 그래도 내 재가 제일 활활 탔다고! 남들 건 숯덩이도 안 됐어!
    **아린:** (고개를 절레절레) 그래, 그래. 활활 탄 재. 아주 대단하다.

    **[3컷]**
    **배경:** 류진이 그린 룬이 다시 희미하게 사라지는 순간. 아린이 류진의 어깨를 툭 친다.
    **아린:** 어쨌든, 오늘 실습은 여기까지. 아르카나스 교수님이 오신다잖아.
    **류진:** (툴툴거리며) 젠장, 또 그놈의 완벽주의자 교수님. 이번에도 쓸데없는 철학 강의나 하시겠지. 마법은 실전인데 말이야.

    **[4컷]**
    **배경:** 실습실 입구. 짙은 남색 로브를 걸치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후드를 쓴 ‘아르카나스 교수’가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선다. 그의 주변에서는 은은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다. 학생들은 일제히 조용해진다.
    **아르카나스 교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여러분, 수고가 많습니다. 마법이란 단순히 주문을 외우고 룬을 그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의 근원과 소통하며, 때로는 금지된 영역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이기도 하죠.
    **내레이션:**
    아르카나스 교수님은 언제나 그렇게, 심오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평소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그의 목소리가 뇌리에 박혔다.

    **[5컷]**
    **배경:** 교수님의 뒷모습 클로즈업. 그의 로브 자락 아래로, 희미하게 빛나는 룬 문양이 스쳐 지나간다. 류진은 교수님의 말에 집중하며, 그의 로브에 순간 비친 문양을 의식적으로 바라본다.
    **아르카나스 교수:**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강력한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 학원이 자랑하는 ‘선진 마법’의 뒤에는, 때로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그림자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 그 그림자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6컷]**
    **배경:** 류진과 아린이 실습실을 나오며 복도를 걷고 있다. 류진은 여전히 교수님의 말을 곱씹는 듯한 표정이다.
    **류진:** (중얼거리며)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그림자라… 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아린:** (하품하며) 에이, 늘 하시던 소리잖아. 마법은 위험하다, 금기를 어기지 마라, 이런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거. 너도 참 쓸데없이 진지하다니까.
    **류진:** (턱을 만지며) 흐음… 뭔가 평소랑 달랐어. 왠지 모르게 쎄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7컷]**
    **배경:** 류진의 게임 인터페이스 창이 반투명하게 떠오른다. ‘새로운 아이템 획득: 오래된 양피지 조각’.
    **류진:**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 이게 뭐야?
    **아린:** (옆에서 빼꼼 보며) 양피지 조각? 언제 주웠어?
    **류진:** 몰라! 방금 막 인벤토리에 들어왔는데? 수업 중에 떨어진 건가?

    **[8컷]**
    **배경:** 류진이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양피지 조각’을 꺼낸다. 누렇게 바래고 가장자리가 찢겨나간 양피지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룬 문자들이 휘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학원의 축소 지도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지도의 한 부분이 붉은색으로 강조되어 있는데, 그곳은 학원 지하 깊은 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류진:** (양피지를 자세히 보며) 이 글자… 이건 분명 고대 룬 문자인데. 내용이 거의 파손돼서 알아볼 수가 없네.
    **아린:** (양피지를 뺏어 들며) 지도도 있잖아? 어? 이거 우리 학원 지하 아니야? 여기, 도서관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서… 여기! 표시된 곳이 완전 지하 깊숙한 곳인데?
    **류진:** (눈을 가늘게 뜨며) 학원 지하… 도서관 아래쪽은 출입 통제 구역 아니었나? 저번에 몰래 들어가려다 경비 마법에 감전될 뻔했는데.

    **[9컷]**
    **배경:** 류진과 아린이 서로를 마주본다. 류진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모험심이 동시에 깃들어 있다.
    **아린:** 저번엔 그랬지. 근데 이 양피지… 왠지 단순한 쓰레기는 아닐 것 같지 않아? 이런 고대 룬 문자까지 새겨져 있는데? 뭔가 비밀 통로라거나, 숨겨진 퀘스트 같은 거 아닐까?
    **류진:** (빙긋 웃으며) 숨겨진 퀘스트라… 왠지 모르게 교수님이 말씀하신 ‘금지된 영역’이 떠오르는 건 나뿐이냐?
    **아린:**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때? 우리가 ‘금기’를 파헤쳐서 학원의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 되는 거지! 가자, 류진! 모험이다!

    **[10컷]**
    **배경:** 밤이 깊은 크레센트 마법학원.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류진과 아린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오래된 창고 건물 쪽으로 몰래 향하고 있다. 창고 문은 낡았고,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류진:** (속삭이며) 조심해, 아린. 여기 경비 마법이 생각보다 약한 것 같지 않아?
    **아린:** (작은 마법으로 주변을 살피며) 응. 오래돼서 그런가, 거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 아마 사용되지 않는 곳이라 관리가 허술한가 봐.
    **내레이션:**
    우리는 양피지 조각에 그려진 대로, 학원의 가장 후미진 곳, 낡고 오래된 창고 건물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먼지가 가득한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11컷]**
    **배경:** 낡은 창고 내부.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고,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류진이 양피지 조각을 들고 지도를 확인하며 벽 한쪽에 손을 댄다. 그러자 벽 일부가 스르륵 밀리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난다.
    **류진:** (놀란 목소리로) 찾았다! 진짜였어!
    **아린:** (눈을 반짝이며) 대박! 이거 완전 보물 지도 아냐?!

    **[12컷]**
    **배경:** 숨겨진 통로 안. 계단이 아래로 끝없이 이어져 있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친다. 통로의 벽면에는 고대 룬 문자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내레이션:**
    우리는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이끌리듯, 학원의 심장부 깊은 곳으로…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13컷]**
    **배경:** 통로를 한참 내려온 후, 류진과 아린이 넓은 공간에 다다른다. 이 공간은 낡고 고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며, 벽면에는 복잡하고 음침한 마법진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는 비어있는 철제 케이지들이 여러 개 놓여 있고, 그 주변에는 기묘한 형태의 붉은색 ‘룬 석’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류진:**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가… 대체 뭐 하는 곳이지?
    **아린:** (몸을 떨며) 으으… 분위기가 너무 으스스해. 마법진도 뭔가 불길하고…

    **[14컷]**
    **배경:** 류진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탁자로 향한다. 탁자 위에는 먼지 쌓인 가죽 양장본이 놓여 있다.
    **류진:** 저건… 기록물인가?

    **[15컷]**
    **배경:** 류진이 가죽 양장본을 집어 들고 표지의 먼지를 털어낸다. 낡은 종이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류진이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긴다.
    **류진:** (작은 소리로 읽기 시작한다) “제12차 생체 마나 추출 실험 보고서… 대상: 미확인 마정석… 수율 78%… 미흡… 다음 실험 대상으로는 ‘고위 정령’ 또는 ‘희귀 마수’ 추천…”
    **아린:** (경악하며) 생체 마나 추출? 정령이나 마수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고?

    **[16컷]**
    **배경:** 류진이 다음 장을 넘긴다. 페이지에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과 함께 스케치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는 투명한 유리관 안에 갇힌 채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작은 생명체들, 혹은 인간형의 희미한 형상이 보인다. 그들의 몸에는 가느다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고, 파이프는 거대한 장치로 이어진다. 장치는 붉은색 마나를 흡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류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완전한 결속을 위한 희생… 금지된 연성 마법… 크레센트 학원의 위대한 업적은 이 희생 위에 서리라…”
    **내레이션:**
    그 순간, 우리의 머릿속에 아르카나스 교수님의 목소리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자라나는 그림자… 너무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 그 그림자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17컷]**
    **배경:** 류진의 얼굴 클로즈업. 그의 눈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뒤편으로 아린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보인다. 그들의 뒤에서, 낡고 삐걱거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류진:** (굳은 표정으로) 이… 이런 끔찍한 짓을… 학원에서…

    **[18컷]**
    **배경:** 어둠 속에서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틈새로 섬뜩한 붉은색 마나의 기운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진다.
    **내레이션:**
    우리는 크레센트 마법학원의 빛나는 명성 아래 감춰진, 가장 추악하고 잔혹한 금기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주인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피소드 1 끝]**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청룡산맥 깊은 곳, 짙푸른 기운이 어린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음침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줄기 계곡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잊혀진 계곡’이라 불렀고,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이따금 기괴한 빛이 번뜩인다는 소문 탓이었다.

    진우는 그 잊혀진 계곡 초입, 해묵은 바위틈에서 간신히 뿌리를 내린 영지버섯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한 손에는 낡고 닳은 도검을, 다른 손에는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가난한 삶, 이렇다 할 연고도, 뛰어난 재능도 없었던 진우에게 청룡산맥은 유일한 삶의 터전이자 가끔은 좌절을 안겨주는 거대한 존재였다. 그는 여기서 희귀한 약초를 캐내어 간신히 끼니를 잇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영지버섯이라면, 며칠은 배를 채울 수 있겠어.”

    진우는 조심스럽게 버섯을 따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때였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몸이 얼어붙을 듯한 맹수의 포효. 단순한 산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진우의 몸에 경고 신호가 울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거대한 그림자가 숲을 가르며 진우에게로 쇄도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진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녀석은 바로 청룡산맥의 지배자라 불리는 ‘광폭한 혈랑’이었다. 평소에는 인간을 피해 다니지만, 한 번 광폭해지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악한 존재.

    “젠장…!”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혈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그 속도는 진우의 상상을 초월했다. 낡은 도검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우는 정신없이 숲 속을 가로질렀다. 거친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발밑의 돌멩이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움직였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잊혀진 계곡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혈랑의 포효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진우는 절박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절벽 아래는 시커먼 어둠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죽음뿐이리라. 하지만 혈랑에게 잡히는 것 역시 죽음이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이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면, 기꺼이 뛰어들 것이었다. 그는 절벽 끝으로 몸을 날렸다. 발아래 허공이 펼쳐졌고, 몸이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떨어지는 순간에도 진우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몸이 벼랑에 부딪히고, 나뭇가지에 걸려 찢겨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그의 몸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눈을 뜨자, 익숙한 어둠이 아닌 희미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절벽 아래에 숨겨진 거대한 동굴이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흙과 이끼가 깔려 있었고, 동굴 천장에서는 영롱한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여…여기는 어디지?”

    진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시고 피가 흘렀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혈랑에게서 도망치다 떨어진 것이 오히려 그를 살린 셈이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진우는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빛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웅장한 돌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듯 고색창연했지만, 그 위에는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색 비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석은 아무런 장식도,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매끄럽고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그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파동이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제단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비석에 닿는 순간, 차가운 돌덩이라 생각했던 비석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와 영상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 신선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수한 수련법과 비기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뼈에 새겨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이게 뭐야…!”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비석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비석은 그의 몸속으로 거대한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 흐르던 미약한 기운은 순식간에 불어나 폭주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진우의 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 비석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동굴 전체를 비췄다. 비석 표면에 희미하게 감춰져 있던 고대의 문양들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 문양들은 진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빛을 발했다.

    엄청난 에너지에 진우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무영비공(無影秘功)’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그 위를 유유히 거니는 신선들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굴 안에는 오직 검은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만이 잔잔하게 진우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진우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청룡산맥 깊은 곳, 짙푸른 기운이 어린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음침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줄기 계곡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잊혀진 계곡’이라 불렀고,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고, 이따금 기괴한 빛이 번뜩인다는 소문 탓이었다.

    진우는 그 잊혀진 계곡 초입, 해묵은 바위틈에서 간신히 뿌리를 내린 영지버섯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한 손에는 낡고 닳은 도검을, 다른 손에는 약초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엿보였다. 가난한 삶, 이렇다 할 연고도, 뛰어난 재능도 없었던 진우에게 청룡산맥은 유일한 삶의 터전이자 가끔은 좌절을 안겨주는 거대한 존재였다. 그는 여기서 희귀한 약초를 캐내어 간신히 끼니를 잇고 있었다.

    “이 정도 크기의 영지버섯이라면, 며칠은 배를 채울 수 있겠어.”

    진우는 조심스럽게 버섯을 따내 바구니에 담았다. 그때였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몸이 얼어붙을 듯한 맹수의 포효. 단순한 산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진우의 몸에 경고 신호가 울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거대한 그림자가 숲을 가르며 진우에게로 쇄도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진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두 눈, 돌덩이처럼 단단한 근육질의 몸,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녀석은 바로 청룡산맥의 지배자라 불리는 ‘광폭한 혈랑’이었다. 평소에는 인간을 피해 다니지만, 한 번 광폭해지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포악한 존재.

    “젠장…!”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혈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그 속도는 진우의 상상을 초월했다. 낡은 도검으로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우는 정신없이 숲 속을 가로질렀다. 거친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발밑의 돌멩이에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지만,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그를 움직였다.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잊혀진 계곡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혈랑의 포효가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진우는 절박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절벽 아래는 시커먼 어둠만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곳으로 떨어지면 죽음뿐이리라. 하지만 혈랑에게 잡히는 것 역시 죽음이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살기 위한 유일한 길이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면, 기꺼이 뛰어들 것이었다. 그는 절벽 끝으로 몸을 날렸다. 발아래 허공이 펼쳐졌고, 몸이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떨어지는 순간에도 진우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몸이 벼랑에 부딪히고, 나뭇가지에 걸려 찢겨나갔다.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그의 몸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눈을 뜨자, 익숙한 어둠이 아닌 희미한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은 절벽 아래에 숨겨진 거대한 동굴이었다. 바닥에는 부드러운 흙과 이끼가 깔려 있었고, 동굴 천장에서는 영롱한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박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여…여기는 어디지?”

    진우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시고 피가 흘렀지만,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혈랑에게서 도망치다 떨어진 것이 오히려 그를 살린 셈이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진우는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빛을 향해 걸어갔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웅장한 돌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바닥에는 오래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듯 고색창연했지만, 그 위에는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색 비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석은 아무런 장식도,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매끄럽고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그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파동이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운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느껴졌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제단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비석에 닿는 순간, 차가운 돌덩이라 생각했던 비석에서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와 영상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 신선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수한 수련법과 비기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뼈에 새겨지고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이…이게 뭐야…!”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그의 손은 비석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비석은 그의 몸속으로 거대한 에너지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의 몸속에 흐르던 미약한 기운은 순식간에 불어나 폭주하기 시작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찾아왔다.

    진우의 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 비석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거대한 빛을 뿜어내며 동굴 전체를 비췄다. 비석 표면에 희미하게 감춰져 있던 고대의 문양들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그 문양들은 진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빛을 발했다.

    엄청난 에너지에 진우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무영비공(無影秘功)’이라는 네 글자와 함께,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그 위를 유유히 거니는 신선들의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동굴 안에는 오직 검은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만이 잔잔하게 진우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진우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산은 거대한 파도처럼 구름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풍경 속, 이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 든 것은 낡은 지도 조각과 닳아 빠진 가죽으로 감싼 금속 조각 하나. 학계에서는 그를 ‘이단아’라 불렀고, 그의 연구를 ‘망상’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진우는 확신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모든 기록에서 지워진 고대 문명, ‘아스라’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그의 연구는 수년 전, 우연히 발견된 정체불명의 금속 조각에서 시작되었다.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고, 어떤 분석 장비로도 그 성분을 명확히 밝혀낼 수 없었던 신비한 물질.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그 어떤 고대 문자의 데이터베이스에도 없었다. 그러나 진우는 직감했다. 이것이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집념은 결국 수많은 고문헌과 신화 속에서, 금속 조각의 문양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아스라의 별’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 별이 ‘고룡산 심장부의 푸른 심장’과 연결된다는 흐릿한 기록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몇 달간의 고된 추적 끝에 진우는 드디어 고룡산 깊숙한 곳, 지도에도 없는 샛길을 따라 이어진 거대한 암벽 앞에서 멈춰 섰다. 무성한 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위장된 곳.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드디어….”

    메마른 손으로 덩굴을 헤치자, 거대한 동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진우는 헤드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간간이 기분 나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수천 년 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 문명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동굴은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굽이진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까, 갑자기 그의 눈앞에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마다, 깎아지른 듯 정교하게 다듬어진 벽면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석상들이 드러났다. 단순한 석재가 아니었다. 옅은 회색빛을 띠는 매끄러운 표면은 마치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진짜였어….” 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학자들에게는 망상이었던 그의 연구가, 지금 그의 눈앞에서 실체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유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곳곳에 알 수 없는 장치들이 멈춘 채 잠들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진우는 직감적으로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 모든 비밀이 잠들어 있을 터였다.

    마침내, 그는 거대한 원형 홀에 도착했다. 홀의 중앙에는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거대한 수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푸른빛은 홀 전체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물들였다. 바로 그것이었다. ‘고룡산 심장부의 푸른 별’이 의미하는 것. ‘아스라의 별’이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수정체에 다가갔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진동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손에 쥔 금속 조각을 수정체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금속 조각이 푸른빛을 발하며 수정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진우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그의 몸은 압축되고 늘어나는 듯했고, 의식은 저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가고 있었다.

    ***

    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거대한 건축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반투명한 물질로 만들어진 듯한 비행체들이 소리 없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거리는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마치 SF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아스라… 문명….”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과거의 아스라 문명임을 직감했다. 놀랍게도, 그는 주위 사람들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별의 심장’이 그의 뇌에 그들의 언어를 직접 각인시킨 것일까?

    진우는 거리를 거닐며 그들의 삶을 탐색했다. 아스라인들은 자연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화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건물 사이에는 거대한 생체 발광 식물들이 자리했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 도시 전체가 운영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도시에서, 진우는 어딘가 모를 불안감을 감지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경고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거대한 중앙 도서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그곳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도서관 내부는 첨단 홀로그램 장치와 함께 고대 문자로 쓰인 방대한 기록들로 가득했다. 진우는 이 모든 것이 ‘별의 심장’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손에 든 금속 조각을 이용해 홀로그램 기록을 활성화시켰다.

    기록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아스라 문명은 단순한 고대 문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까지 보유했던 초월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별의 심장’은 단순한 시간 여행 장치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자체를 조작하고 기록하며, 심지어는 현실의 차원까지 왜곡할 수 있는 궁극의 장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술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그 힘을 제어하려는 오만은 결국 재앙을 불러왔다. 기록에는 ‘대붕괴’라 불리는 사건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아스라 문명은 인류에게 다가올 거대한 재앙, 별의 충돌을 막기 위해 ‘별의 심장’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시간을 뒤틀어 더 큰 차원 붕괴를 일으켰고, 결국 문명 전체가 시간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는 비극을 맞았다.

    그들은 멸망 직전, 마지막 희망으로 ‘별의 심장’을 이용해 자신들의 모든 지식과, 비극의 원인, 그리고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를 미래의 특정 시점에 고룡산 지하 유적에 봉인했다. 그리고 그 유적은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계되었다. 미래의 누군가가 그들의 메시지를 발견하여,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절규와도 같은 유언이었다.

    진우는 기록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는 순간, 다시금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빛이 그를 감싸 안으며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려 놓았다.

    ***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익숙한 어둠 속, 현재의 폐허가 된 아스라 유적 한가운데 서 있었다. ‘별의 심장’은 더 이상 푸른빛을 띠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백색광을 내뿜으며 진우의 손끝에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손에 쥐었던 금속 조각은 수정체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진 뒤였다.

    진우는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 아스라 문명은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중요한 경고를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봉인한 것이었다. 그들의 폐허가 된 유적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울려 퍼지는 경고의 메아리였다.

    그는 유적을 둘러보았다. 모든 벽화와 상형문자들이 이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단순한 미스터리였던 것들이, 이제는 선명한 언어로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연구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사라진 문명의 마지막 증인이자, 미래를 위한 파수꾼이 되었다.

    그의 심장은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새로운 사명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 위대한 유산을, 그 안에 담긴 경고의 메시지를 세상에 알려야 했다. 학자들이 그를 또다시 비웃을지라도, 그는 이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스라 문명의 비극이 다시는 인류에게 반복되지 않도록, 그는 고대 문명이 남긴 마지막 절규를 세상에 전할 것이다.

    진우는 조용히 유적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이제 더 이상 낡은 지도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의 무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고 넘치는 박수와 환호성이 천장 없는 경기장을 메웠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이곳, 천하제일무술대회의 8강전 첫 경기가 막을 내린 참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중앙 무대 위에는 떡하니, 마치 방금 산책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강진우가 서 있었다.

    “흐음… 싱겁군.”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장내에서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지루함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뒤흔들던 흑호권(黑虎拳)의 맹주, ‘철갑맹수(鐵甲猛獸)’ 오만식은 지금 무대 한쪽 구석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전신을 강철처럼 단련했다는 그의 육체는 강진우의 발끝 한 번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강진우가 하품을 참으며 왼발 뒤꿈치로 대충 바닥을 긁는 척하다가 오만식의 발목을 ‘우연히’ 걸어 넘어뜨린 결과였다.

    “크으… 역시 저 양반이야.”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었어. 저리 힘을 빼고 싸우는데도…”
    “하지만 저건 좀 너무했지 않나? 하품을 하다가 이기다니.”

    관중석에서는 경외와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강진우는 그런 시선들을 한데 묶어 대충 훑어보더니, 심판의 승리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집으로 퇴근하는 직장인처럼 무덤덤하게 경기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야, 강진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통로 어귀에서 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그 특유의 낭랑한 기세를 타고 강진우의 고막을 때렸다. 강진우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불꽃 같은 붉은색 도복을 입고, 허리춤에 늘 차고 다니는 검집의 은장식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한소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와 앙다문 입술은 마치 방금 맹수라도 사냥하고 온 듯한 기세였다.

    “네놈은 정말… 무림 고수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냐?”

    한소희는 혀를 차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붙였다. 강진우는 그녀를 향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글쎄, 무림 고수는 잠시 낮잠도 못 자는 모양이지? 난 방금 그 양반 맹호권을 쓰길래, 지루해서 하품하다가 그만… 실수로 걸려 넘어진 줄 알았는데.”
    “실수? 그게 네놈 필살기냐? ‘하품 걸려 넘어뜨리기’?”

    한소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강진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코앞에 섰다. 강진우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한소희도 한 기세 하는지라 전혀 위축되지 않고 그를 올려다봤다. 팽팽한 긴장감, 아니, 팽팽한 싸움닭 두 마리가 마주 선 듯한 기운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그나저나, 네 녀석은 벌써 다음 경기 준비라도 마쳤나? 벌써부터 그렇게 험악한 인상으로 서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 옆에서 감히 숨이라도 쉬면 당장 베어버릴 기세로군.” 강진우가 삐딱하게 말했다.
    “흥! 다음 경기 상대는 듣보잡이지만, 난 언제나 만전을 기한다. 네놈처럼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고 나온 불량배와는 다르지.”
    “불량배라… 허허, 네 녀석의 입은 여전하군. 독설로 천하제일이 되려는 모양이지?”

    강진우가 콧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경기장 한쪽에서 난데없이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한 종소리는 두 사람의 말싸움을 끊었고, 이내 낭랑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군들, 잠시 주목해주시게!”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무대 중앙에 나타난 천하제일무술대회의 총관, 백발의 노인 청풍대사를 바라봤다. 청풍대사는 늘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는 뭔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8강전에 예기치 않은 변고가 생겼네.”

    변고? 강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소희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청풍대사를 주시했다. 무림의 고수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대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대회 경기장이 위치한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어젯밤부터 기이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 그 기운이 워낙 강성하여, 경기장 내부의 기의 흐름이 불안정해지고 있네. 특히 선수 대기실과 숙소 쪽은 아예 기의 흐름이 뒤틀려, 잠시 동안은 고수들이 편안히 수련하거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상황일세.”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림 고수들에게 기의 흐름은 곧 생명과도 같은 것. 수련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전투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회 본부에서는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네!”

    청풍대사가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강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옆에 선 한소희도 침을 꿀꺽 삼켰다.

    “남아있는 8강 진출자들은, 지금부터 경기 종료 시까지… 임시로 마련된 ‘합숙소’에서 지내야 할 것이네!”

    합숙소?
    강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무림 고수들이 다 큰 어른이 되어서… 합숙?

    “더욱이, 기의 흐름 안정화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공간이므로, 각 방에는… 두 명의 고수가 함께 머물러야 하네! 이건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이니만큼, 제군들이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리라 믿네.”

    청풍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는 폭발하듯 시끄러워졌다. 합숙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이와 한 방을 쓰라니! 무림 고수들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대체 누가 누구와 함께 쓴다는 겁니까?!”

    어느 문파의 장로가 소리쳤다.
    청풍대사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자, 그럼 방 배정을 발표하겠네!”

    강진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던 한소희 역시 왠지 모를 불안감에 눈을 깜빡였다.

    “첫 번째 방! 운무도(雲霧島)의 비검사(飛劍士) 이정환 군과… 사자후(獅子吼)의 계승자 무광 스님!”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검과 주먹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청풍대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강진우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뛰었다. 설마… 설마…

    “마지막으로…”

    청풍대사의 시선이 강진우와 한소희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불길한 확신에 휩싸였다.

    “‘태극검화(太極劍花)’ 한소희 양과… ‘만사태평(萬事太平)’ 강진우 군!”

    정적이 흘렀다.
    이어지는 억눌린 웃음소리와 탄식, 그리고 경악의 목소리들.

    “뭐, 뭐요?!” 한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강진우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젠장, 만사태평? 누가 나를 만사태평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전혀 태평할 수가 없잖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배정입니까, 대사님! 저, 저 불량배랑 저를 한방에 넣다니요?!”
    “불량배? 네 녀석은 입에서 나오는 게 다 욕설뿐이냐? 나는 이 나이에 계집애랑 한 방을 쓰면 잠이나 제대로 잘지 모르겠군.”

    두 사람은 격렬하게 서로를 노려봤다. 이글거리는 한소희의 눈빛과, 귀찮다는 듯 살짝 찌푸려진 강진우의 미간.

    “제군들, 이것은 대회의 엄숙한 결정일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네!” 청풍대사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못을 박았다.

    잠시 후, 털썩이는 소리와 함께 강진우와 한소희는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한옥 방 문턱에 도착했다. 방문 앞에는 ‘한소희-강진우’라고 단정하게 쓰인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은 넓지 않았다. 작은 상이 놓여 있고, 양옆으로 요 두 채가 깔려 있었다. 방 중앙을 기준으로 왼쪽은 한소희의, 오른쪽은 강진우의 공간인 듯했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한소희가 씩씩대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강진우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보자마자 자신의 요가 깔린 곳에 허리춤의 검을 팽개치듯 던졌다. 강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검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지는 게 어디 있나. 검은 검사의 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 혼을 어찌하든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너나 네 혼 잘 간수해!”

    한소희는 뾰족하게 받아쳤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강진우의 짐… 아니,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에 닿았다.

    “그게 다 네 짐이냐?”
    “그럼. 옷 몇 벌하고 칫솔, 그리고 내 꿀단지 하나면 충분하다.”
    “꿀단지?! 네놈은 그렇게 대충 살아서 이 대회에 참가한 거냐? 기껏해야 사탕이나 빨아먹으러 온 아이놈도 아니고!”

    한소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진우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요 위에 보따리를 던져 놓았다. 그리고는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고 싶군.”

    그가 눈을 감고 팔베개를 하려는 순간, 한소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야! 아직 밤도 안 됐는데 벌써 잘 생각이야? 방금 온 사람이 그렇게 누워도 되는 거냐? 최소한의 예의도 없어?!”
    “피곤한데 뭐 어떠냐. 넌 잠도 안 자고 수행만 하는 로봇이냐? 그럼 넌 거기 서서 밤새도록 수행이나 하든가.”

    강진우는 눈을 살짝 뜨며 한소희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튀겼다. 좁디좁은 방 안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출전한 두 고수는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합숙 생활은, 과연 평화로울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이 두 사람은 과연 하룻밤이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쨍쨍했지만, 이 방 안에는 왠지 모를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삭막한 스카이라인 위로 불그스름한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아르테미스 팰리스’의 최상층 펜트하우스. 최첨단 보안 시스템과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마치 도시 속 요새 같았다. 하지만 그 요새 안에서,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강진우 씨, 제발 이번만이라도 제 전화 좀 받아주시죠.”

    유은서 경위는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벌써 열 번째 시도였다. 수화기 너머로 지루한 연결음만 계속될 뿐이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온통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 찬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박 회장의 서재.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모든 단서가 살인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회장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는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붉은 점 하나가 선명했다.

    드디어, 연결음이 멈추고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경위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군. 또 사람 죽었습니까?”
    진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예감이 아니라,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박 회장입니다. 밀실 살인이에요. 박 회장님이 돌아가셨어요. 목에… 아주 작은 흔적이 있습니다만, 도저히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어요.”
    “밀실이군. 재미있겠네.”
    “재미있다니요!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까? 경찰은 손발이 다 묶였어요. 현장에선 어떤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CCTV도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어요. 이건 마치 유령이… 유령이 저지른 일 같다고요!”
    “유령은 존재하지 않아, 유 경위님.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림자가 있을 뿐이지. 위치 보내요. 지루한 오후였는데 잘됐네.”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은서는 한숨을 쉬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강진우. 그 천재적인 괴짜만이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는 평범한 탐정이 아니었다. 때로는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리거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감지하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보였지만,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늘 범죄의 본질을 꿰뚫었다. 사람들은 그를 ‘영능력자’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진우 본인은 그저 ‘미세한 흐름’을 읽을 뿐이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우가 현장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 후줄근한 트렌치코트에 헝클어진 머리,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빛만이 차가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유 경위님, 여전하군. 스트레스에 찌든 얼굴이 안쓰럽네.”
    “괜찮습니다. 어서 현장으로 가시죠.”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우는 제일 먼저 공기 중의 미묘한 떨림을 감지하려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은서는 그의 행동에 익숙했지만, 함께 온 형사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음….” 진우가 낮게 읊조렸다. “여기, 흥미로운 그림자가 있군.”
    그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신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책상 모서리, 서가, 벽지, 심지어 천장의 미세한 균열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고 있는 듯했다.

    “창문은 어때요?” 진우가 물었다.
    “완벽하게 잠겨 있었습니다. 방충망과 방탄유리 모두 그대로였고요.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은서가 설명했다.
    진우는 창가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쓸었다. 그는 창틀 가장자리의 먼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진 금속 마감재를 발견했다.
    “여긴…” 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잔상’이 보였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이었다.
    “무언가 빠른 속도로 여기를 통과했군. 아주 작고, 아주 날카로운 것.”
    “무슨 말씀이세요?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형사 중 한 명이 의아하게 물었다.
    “닫혀 있었겠지. 하지만 아주 미세한 틈은 있었을 거야.” 진우는 손전등을 들어 창틀과 벽 사이의 간극을 비췄다. “아르테미스 팰리스의 건축 공법은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완벽한 건축물은 세상에 없어. 여기, 이 아주 작은 틈새.”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육안으로는 거의 인식하기 어려운, 머리카락 한 가닥이 겨우 지나갈 법한 작은 틈이었다.
    “저 틈으로 뭔가가 들어왔다는 건가요? 불가능합니다. 저긴 공기조차 제대로 통하기 힘들어요.” 은서가 반박했다.
    “공기는 통하겠지. 충분한 힘이 실린다면.” 진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다시 시신으로 돌아와 박 회장의 목덜미를 살폈다. 작은 붉은 점.
    “이건 칼자국이 아니야. 그렇다고 총상도 아니고. 무언가 아주 미세하고 강한 것이 고속으로 충돌한 흔적이지.”
    진우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시야에 희미하게 박 회장의 서재를 감싸고 있던 ‘흐름’들이 나타났다. 사건 직전의 불안정한 감정,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의 압도적인 ‘힘’의 흐름. 그 흐름은 창밖에서 시작되어 그 작은 틈을 통과하고, 박 회장에게 도달한 뒤, 다시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범인은 밖에 있었군.” 진우가 눈을 떴다.
    “밖에요? 그럼 저격수라도 있었다는 말인가요? 하지만 펜트하우스는 주변 건물보다 훨씬 높은데…”
    “아니. 멀리서 저격한 게 아니야. 아주 가까운 곳, 바로 옆 건물.” 진우는 창밖을 가리켰다. 박 회장의 펜트하우스와 불과 20여 미터 떨어진 옆 건물 옥상. “저기에서 시작된 흐름이 가장 선명해.”

    모두의 시선이 옆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이었다.
    “설마, 저기 옥상에서 이쪽으로 뭔가를 날렸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작은 틈으로 정확히 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저격총으로도 불가능한 거리와 정확도예요.”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세상에 ‘평범한 것’만 있는 건 아니잖아?” 진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범인은 기류를 조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 아주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제어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무언가를 조종한 거야.”

    경찰은 혼란스러웠다. 기류 조작?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우의 통찰력은 늘 그런 비현실적인 가정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럼, 뭘 날린 겁니까?” 은서가 물었다.
    “사라지는 것.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진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아이스 픽 같은 모양의 아주 작은 얼음 조각. 특수한 기술로 압축된 얼음이라면 고속으로 날아가 표적을 꿰뚫고, 그 자리에서 녹아 사라지겠지.”
    그의 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잔상’이 보였다. 얼음 조각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박 회장의 목을 꿰뚫고, 순식간에 녹아내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잔상. 그 잔상 주변으로 미세하게 뒤틀린 공기의 흐름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범인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은서가 재차 물었다.
    “범인은 옆 건물 옥상에서 능력을 사용했어. 하지만 옥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 테고, 결정적인 증거는 남기지 않았을 거야. 대신, 이 펜트하우스 안에서 범인과 연결된 다른 흔적이 보였어.”
    진우는 다시 서재 한구석에 있는 공기청정기를 가리켰다.
    “공기청정기. 여기 주변의 ‘흐름’이 이상해. 마치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이 근처에 머물렀던 것처럼 복잡하게 엉켜있어.”
    그리고는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봤다. 박 회장의 책상 위, 고급스러운 명패 옆에 놓인 작은 은색 액자. 그 액자 속에는 박 회장과 젊은 비서, 최 비서가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최 비서….” 은서가 중얼거렸다. 최 비서는 박 회장의 오랜 측근이었고, 누구보다 회장을 충실히 보필하는 사람이었다.

    “최 비서가…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는 흔적과, 범인이 기류를 조작했다는 가설이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죠?” 은서가 혼란스러워했다.
    진우는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했다.
    “밀실 트릭은 늘 뻔한 곳에서 시작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 혹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최 비서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어.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능력을 지녔을 거야. 혹은, 나보다 훨씬 강력한 기류 조작 능력자였겠지.”
    진우는 공기청정기 옆에 놓인 작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 탁자 위, 어딘가에… 아주 미세한 지문 하나쯤은 남아있겠지. 그리고 최 비서의 옷에서 얼음 조각이 녹아내린 물방울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게 결정적인 증거가 될 거야.”

    은서는 진우의 말에 따라 탁자를 꼼꼼히 살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자국.
    “강진우 씨, 그럼 최 비서가 직접 저 옥상에 가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능력을 이용해 옆 건물 옥상에서 얼음 조각을 생성하고, 기류를 조작해 그 조각을 저 작은 틈으로 정확히 날려 보낸 거야.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그녀는 그저 이 방 안, 이 공기청정기 옆에서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기청정기를 틀고, 남은 얼음 흔적마저 없애려 했을 거야.”
    “하지만 왜요? 최 비서가 박 회장을 살해할 이유가…”
    “그건 유 경위님이 밝혀내야 할 부분이지.” 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퍼즐을 맞출 뿐이야.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궤적을 쫓아서.”

    그 순간,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진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예상대로였어. 최 비서가 자백했군. 박 회장의 비자금 횡령을 알고 있었다는군. 그리고 회장이 자신을 해고하려 하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은서는 충격에 휩싸였다. 상상도 못 할 반전이었다. 늘 온화하고 충직했던 최 비서가 살인자라니.
    진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봐, 유 경위님. 유령은 없다고 했잖아? 그저 우리가 보지 못하는 ‘흐름’이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아무리 완벽한 밀실이라도 진실의 문은 열리게 마련이지.”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진우는 서재를 벗어나기 전, 다시 한번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도시를 감싸는 수많은 ‘흐름’들이 보였다. 그 흐름 속에서 또 어떤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을지,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은서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천재 탐정 강진우의 그림자는 그렇게, 도시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흑림(黑林)의 안개는 언제나 끈적했다.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가지마다 덕지덕지 매달린 검은 이끼들은 으스스한 기운을 더욱 진하게 풍겼다. 인간과 마(魔)의 영역을 가르는 거대한 경계, 흑림은 무림인들에게는 금기의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룡문의 소사(少師) 류진(柳眞)은 기어코 이곳까지 발걸음을 했다.

    “쯧, 마기가 진동하는군.”

    류진은 콧등을 찌르는 비릿하고 역한 기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품에서 묵직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집마저도 검은 현철로 단련된 ‘묵룡검(墨龍劍)’. 검은 그의 손에 쥐이자마자 미약한 진동을 시작했다. 흑림의 마기에 대한 검의 경고였다.

    이번 임무는 단순했다. 최근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들어왔고, 그 선봉에 선 것이 류진이었다. 스승님은 늘 그에게 ‘무리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류진은 언제나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였다.

    숲은 침묵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류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뒤틀린 나무들뿐, 그러나 그의 예리한 감각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때였다. 숲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번뜩였다. 일반적인 마기의 기운과는 다른, 맑고도 신비로운 기운. 류진은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숲은 점차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나무들은 더욱 뒤틀렸고, 바닥에는 이름 모를 보랏빛 꽃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피어 있었다. 빛의 근원지는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작은 웅덩이였다. 그러나 웅덩이는 평범하지 않았다. 맑은 물 위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기이한 꽃들이 수를 놓았고, 그 중앙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고고하게 누워 있었다. 짙은 밤색 머리칼은 물결 따라 일렁였고, 백옥 같은 피부는 달빛 아래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무엇보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듯한 비현실적인 자태였다.

    류진은 저도 모르게 묵룡검의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경고음처럼 그의 심장을 울렸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과연 마족인가? 아니면 길을 잃은 요정인가?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발, 또 한 발. 웅덩이 가장자리에 이르러 그는 무릎을 굽히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연꽃 같은 눈이 서서히 열렸다.

    맑고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 그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류진을 빨아들였다. 순간, 류진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마기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고, 원초적인 기운이었다.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흑림의 으스스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목소리 같았다.

    류진은 얼어붙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되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천룡문 류진입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소개했다.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웅덩이 주변의 보랏빛 꽃들이 더욱 진하게 빛나는 듯했다.

    “위험한 곳이라……. 저에게는 익숙한 곳이에요.”

    그녀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듯 류진의 묵룡검에 닿았다. 순간, 묵룡검에서 미약한 ‘칭-‘ 하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 그녀의 존재를 경고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족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마족이 아니었다.

    류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이성은 그녀를 경계하라 속삭였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헤어날 줄 몰랐다.

    “당신은…… 마족입니까?” 류진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아홉 개의 꼬리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색의 털로 뒤덮인 아홉 개의 꼬리, 그 끝자락에서는 섬광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구미호. 요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하다는 전설 속 존재였다.

    “이제야 아셨나요?”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 하나 없이 마른 몸은 마치 환영처럼 느껴졌다. “저는 연화(蓮花)라고 합니다.”

    연화. 연꽃. 이름마저도 그녀의 고고한 자태와 어울렸다.

    “마족은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흑림은 경계 지역…….” 류진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그의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연화는 류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당신은, 어째서 저를 해치지 않으시나요?”

    그녀의 질문에 류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왜일까. 그의 본능은 분명 그녀를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천룡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족은 인간의 적, 무림의 공적이었다. 마땅히 검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묵룡검은 여전히 검집 속에 잠들어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류진은 나직이 대답했다. “다만, 당신에게서 마족 특유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 말에 연화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흑림에 울려 퍼졌다.

    “흥미롭군요.” 연화가 천천히 류진에게로 다가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그녀는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인간들은 늘 제가 아름다운 외양 뒤에 악독한 마음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은 저의 악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그녀가 손을 뻗어 류진의 뺨에 닿으려 했다. 류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뺨에 닿기 직전, 숲 저편에서 날카로운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있다! 저 요물! 류 소사님, 어서 그 요물을 베십시오!”

    세 명의 무림인이 흑림을 가르고 달려왔다. 그들의 눈에는 연화를 향한 맹렬한 증오가 가득했다. 그들은 흑림 주변에서 마족의 준동을 감시하던 천룡문의 제자들이었다.

    류진은 순간 망설였다. 그들 역시 마족을 발견하면 즉시 처단하라는 명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류진의 시선은 아직도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에 갇혀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들 같으니.” 연화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신비로운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그녀의 아홉 꼬리가 일렁이며 류진의 몸을 감쌌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류진은 그녀에게 안긴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연화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림인들을 향하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아홉 꼬리 중 하나가 섬광처럼 뻗어 나갔다. 흑림의 나무들이 일순간 진동하고, 마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간 듯 무림인들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할 압도적인 힘이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연화가 류진을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그녀의 몸이 서서히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꼬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렬하게 섬광을 뿜어내더니, 이내 연화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류진은 홀로 흑림의 웅덩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연화가 앉았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보랏빛 꽃잎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아마 적이 되어 있겠지요.’

    적. 인간과 마족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무림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류진의 심장은 그 철칙을 거부하듯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흑림의 깊숙한 곳, 연화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에는 금지된 연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꽃은, 흑림의 안개처럼 끈적하고, 보랏빛 꽃처럼 치명적이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잊혀진 별의 조각

    **제12화. 균열**

    아레스 호의 함교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계기판의 불빛만이 창백하게 깜빡일 뿐, 평소 활기 넘치던 승무원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캡틴 강태준은 사령관석에 앉아 전방의 칠흑 같은 우주를 응시했다. 시야 밖, 화물칸 깊숙한 곳에 봉인된 ‘그것’이 함선 전체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발견 직후의 전율은 이제 공포로 변색되어 모두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함장님, 통신 기록입니다.”

    옆에서 부함장 이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정한 제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읽어봐.” 강태준은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 22시 03분, 화물칸 보안 프로토콜 무단 해제 시도 감지. 자동 차단되었습니다. 00시 17분, 의료실의 김지아 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선임 기술병 하승우 일병이 원인 불명의 극심한 환각 증세를 보였습니다. 지금은 안정 상태입니다만… 불안정합니다.”

    강태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승우 일병. 마지막 임무가 뭐였지?”

    “제3 탐사팀 소속으로, 3일 전… 유물을 처음으로 육안 관측했습니다.” 서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물. 그들은 애써 ‘블랙 모노리스’ 혹은 ‘특이점’ 같은 무미건조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것은 이미 미지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심우주를 떠돌다 발견한, 거대한 흑요석 같은 육면체. 어떤 장비로도 뚫을 수 없는 불투명한 벽.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와, 내부에서 희미하게 비쳐 나오던 보랏빛 섬광은 그것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님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 부함장, 보안 상태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추가 인원 배치는 없다. 당분간 함선 내 이동은 최소화하고, 모든 탐사팀은 해체한다.”

    “하지만… 아직 유물의 기능도, 안전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건 동의하지만, 추가 조사를 완전히 중단하는 건—” 서하가 반대하려 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강태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가까이 갔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을 뿐이야.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냉정했다. 하지만 서하는 그 차가운 시선 속에 드리워진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통신 보안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래프가 나타났다.

    “함장님! 미확인 암호 패턴이 함선 네트워크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기술장교 박선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다. “출처를 알 수 없습니다! 외부가 아닙니다! 함선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내부라고?!” 강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든 내부 통신을 차단하고, 격벽을 봉쇄해! 바이러스 검사 프로토콜을 가동해!”

    하지만 박선우의 손은 이미 굳어버린 듯 멈춰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갑니다…”

    스크린의 그래프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이내 전체 함교 시스템이 깜빡거리며 멈춰 버렸다. 불이 일제히 꺼지고, 비상등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완벽한 침묵 속에,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였다. 마치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속삭이는 듯한, 혹은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태준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명확했다.

    “화물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뇌리 깊숙이 파고들어,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선율이었다.

    “모든 보안병력, 화물칸으로 집결! 비상 프로토콜 ‘격리’를 발동한다! 누구든 유물에 접근하는 자는… 즉시 제압한다!” 강태준은 비상 호출기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냉철했지만, 손에 쥔 비상 호출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물칸으로 향하는 복도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깜빡이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이한 속삭임이 복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강태준은 옆에서 총을 든 보안장교 최민준을 흘끗 보았다. 민준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장님, 유물에서 나오는 소리 같습니다.” 민준이 헐떡이며 말했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확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속삭임을 넘어, 웅장한 합창처럼 들렸다. 언어가 없는 합창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소리였다.

    마침내 화물칸의 봉쇄된 문에 도착했다. 육중한 강철 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섬광이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문 열어!” 강태준이 명령했다.

    보안팀원들이 코드를 입력하고, 강제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압도적인 기운이 복도 전체를 덮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화물칸 중앙에는 거대한 흑요석 유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보랏빛 섬광은 더욱 강렬해져, 마치 유물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지금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문자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서로 연결되어 알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물 앞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박선우…!” 강태준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함교에서 정신을 잃었던 박선우 기술장교였다. 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유물 앞에 서서, 두 팔을 유물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고, 입술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유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희미한 보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물의 꿈틀거리는 상형문자들이 선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선우! 당장 거기서 떨어져!” 강태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선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유물에 손을 뻗어, 검은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이 유물에 닿자마자, 유물에서 섬뜩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선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때, 선우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 선우의 등 뒤 허공이 일렁였다. 작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 나왔다. 어둠은 순식간에 커져, 검은 장막처럼 선우의 등 뒤를 뒤덮었다.

    균열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은하의 모습, 알 수 없는 행성들의 풍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무한한 공허함. 한순간 모든 승무원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저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갈라졌다.

    균열은 점점 커져,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균열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마치 검은 촉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서서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유물은 그저 고대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의 문이었다. 그리고 박선우는… 그 문을 열고 있었다.

    “사격 준비! 선우를 보호하면서… 저 촉수를 막아!” 강태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명령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최민준을 비롯한 보안팀원들이 즉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플라즈마 소총에서 발사된 광선이 검은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촉수는 마치 허깨비처럼 광선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촉수는 속도를 더해, 박선우의 등 뒤를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촉수가 선우의 어깨를 스치자, 선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가 온다… 오래된 자… 심연의 군주… 문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박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섬뜩하고도 장엄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끝에, 화물칸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균열은 완전히 열렸고, 그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레스 호의 모든 비상등이 꺼졌다.
    침묵과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효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효 속에서, 고대부터 잊혔던 존재의 이름이, 별들의 심연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잊혀진 별의 조각

    **제12화. 균열**

    아레스 호의 함교는 죽음처럼 고요했다. 계기판의 불빛만이 창백하게 깜빡일 뿐, 평소 활기 넘치던 승무원들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캡틴 강태준은 사령관석에 앉아 전방의 칠흑 같은 우주를 응시했다. 시야 밖, 화물칸 깊숙한 곳에 봉인된 ‘그것’이 함선 전체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음을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발견 직후의 전율은 이제 공포로 변색되어 모두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함장님, 통신 기록입니다.”

    옆에서 부함장 이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정한 제복 차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위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읽어봐.” 강태준은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 22시 03분, 화물칸 보안 프로토콜 무단 해제 시도 감지. 자동 차단되었습니다. 00시 17분, 의료실의 김지아 박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선임 기술병 하승우 일병이 원인 불명의 극심한 환각 증세를 보였습니다. 지금은 안정 상태입니다만… 불안정합니다.”

    강태준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하승우 일병. 마지막 임무가 뭐였지?”

    “제3 탐사팀 소속으로, 3일 전… 유물을 처음으로 육안 관측했습니다.” 서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유물. 그들은 애써 ‘블랙 모노리스’ 혹은 ‘특이점’ 같은 무미건조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마음속 깊이 그것은 이미 미지의 존재로 각인되어 있었다. 심우주를 떠돌다 발견한, 거대한 흑요석 같은 육면체. 어떤 장비로도 뚫을 수 없는 불투명한 벽.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와, 내부에서 희미하게 비쳐 나오던 보랏빛 섬광은 그것이 단순한 돌덩이가 아님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 부함장, 보안 상태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 추가 인원 배치는 없다. 당분간 함선 내 이동은 최소화하고, 모든 탐사팀은 해체한다.”

    “하지만… 아직 유물의 기능도, 안전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건 동의하지만, 추가 조사를 완전히 중단하는 건—” 서하가 반대하려 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강태준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가까이 갔다가는 더 많은 것을 잃을 뿐이야.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냉정했다. 하지만 서하는 그 차가운 시선 속에 드리워진 깊은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알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통신 보안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그래프가 나타났다.

    “함장님! 미확인 암호 패턴이 함선 네트워크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기술장교 박선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오갔다. “출처를 알 수 없습니다! 외부가 아닙니다! 함선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내부라고?!” 강태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모든 내부 통신을 차단하고, 격벽을 봉쇄해! 바이러스 검사 프로토콜을 가동해!”

    하지만 박선우의 손은 이미 굳어버린 듯 멈춰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공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안 됩니다… 접근이… 안 됩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어갑니다…”

    스크린의 그래프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이내 전체 함교 시스템이 깜빡거리며 멈춰 버렸다. 불이 일제히 꺼지고, 비상등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완벽한 침묵 속에,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였다. 마치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데 섞여 속삭이는 듯한, 혹은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졌고, 어딘가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강태준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명확했다.

    “화물칸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단순한 음파가 아니었다. 뇌리 깊숙이 파고들어, 오래전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섬뜩하고도 매혹적인 선율이었다.

    “모든 보안병력, 화물칸으로 집결! 비상 프로토콜 ‘격리’를 발동한다! 누구든 유물에 접근하는 자는… 즉시 제압한다!” 강태준은 비상 호출기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냉철했지만, 손에 쥔 비상 호출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화물칸으로 향하는 복도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깜빡이며 공포를 증폭시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이한 속삭임이 복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강태준은 옆에서 총을 든 보안장교 최민준을 흘끗 보았다. 민준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그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장님, 유물에서 나오는 소리 같습니다.” 민준이 헐떡이며 말했다.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소리는 확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속삭임을 넘어, 웅장한 합창처럼 들렸다. 언어가 없는 합창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함께,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소리였다.

    마침내 화물칸의 봉쇄된 문에 도착했다. 육중한 강철 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섬광이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문 열어!” 강태준이 명령했다.

    보안팀원들이 코드를 입력하고, 강제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압도적인 기운이 복도 전체를 덮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화물칸 중앙에는 거대한 흑요석 유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보랏빛 섬광은 더욱 강렬해져, 마치 유물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유물의 표면에 새겨진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지금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나하나의 문자가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서로 연결되어 알 수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물 앞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박선우…!” 강태준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함교에서 정신을 잃었던 박선우 기술장교였다. 그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유물 앞에 서서, 두 팔을 유물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흰자위만 보였고, 입술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유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희미한 보랏빛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유물의 꿈틀거리는 상형문자들이 선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선우! 당장 거기서 떨어져!” 강태준이 소리쳤다.

    하지만 선우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유물에 손을 뻗어, 검은 표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이 유물에 닿자마자, 유물에서 섬뜩한 파장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선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때, 선우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 선우의 등 뒤 허공이 일렁였다. 작은 균열이 생겨나더니, 그 균열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 나왔다. 어둠은 순식간에 커져, 검은 장막처럼 선우의 등 뒤를 뒤덮었다.

    균열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듯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은하의 모습, 알 수 없는 행성들의 풍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무한한 공허함. 한순간 모든 승무원들이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전율을 느꼈다.

    “저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갈라졌다.

    균열은 점점 커져,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균열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마치 검은 촉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서서히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태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유물은 그저 고대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원의 문이었다. 그리고 박선우는… 그 문을 열고 있었다.

    “사격 준비! 선우를 보호하면서… 저 촉수를 막아!” 강태준은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명령은 총소리에 묻혀버렸다.

    최민준을 비롯한 보안팀원들이 즉시 사격 자세를 취했다. 플라즈마 소총에서 발사된 광선이 검은 촉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촉수는 마치 허깨비처럼 광선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촉수는 속도를 더해, 박선우의 등 뒤를 완전히 감싸기 시작했다.

    촉수가 선우의 어깨를 스치자, 선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아니었다.

    “*…그가 온다… 오래된 자… 심연의 군주… 문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박선우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섬뜩하고도 장엄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 끝에, 화물칸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균열은 완전히 열렸고, 그 안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레스 호의 모든 비상등이 꺼졌다.
    침묵과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침묵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효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포효 속에서, 고대부터 잊혔던 존재의 이름이, 별들의 심연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