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이상한 만남과 수상한 그녀
대학교 도서관 건물을 코앞에 두고 발이 엉켰다. 젠장! 망할 돌부리! 지훈은 아침부터 꼬이는 운수에 이를 악물었다. 오늘 오전 9시, 전공 필수 발표가 있었다. 어제 밤샘 작업으로 겨우 완성한 자료는 USB 안에 고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몰골은 밤샘 노숙자 수준이었다.
“크, 크흠… 늦었잖아, 김지훈!”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데, 하필 손에 들려있던 커피가 왈칵 쏟아졌다. 정확히는, 방금 막 몸을 일으킨 그의 셔츠 한가운데에.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액체가 흰 셔츠에 검은 얼룩을 선명하게 새겼다. 마치 ‘오늘 하루 망했음’이라고 크게 써놓은 것 같았다.
“젠장, 진짜!”
하필 오늘 아침 공강 시간에 샤워를 하겠다는 엉뚱한 결심을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발표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교수님은 깔끔한 복장을 중요시하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기숙사까지 뛰어갔다 올 시간은 없었다. 머릿속으로 급히 플랜 B를 짜내려는데, 갑자기 그의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런, 이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대로라면 너의 중요한 계획이 망가지겠군.”
나직하면서도 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고, 비단 같은 피부는 한 점 티도 없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미모에, 지훈은 셔츠의 얼룩도 잊은 채 넋을 잃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흐읍… 저, 저기… 누… 누구세요?”
“음? 나의 이름을 묻는가? 아직 때가 아니거늘… 아니, 아니다. 너의 계획을 돕기 위해선 간단한 소개는 필요하겠지. 나는 아린이라고 한다.”
아린. 그 이름마저도 신비로웠다. 그녀는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으로 지훈의 커피 자국을 내려다봤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쭈뼛거렸다. 왠지 모르게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오, 이런. 냄새마저 역겹구나.”
그녀의 한마디에 지훈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 방금 ‘역겹다’고? 이 완벽한 미인이 내게 역겹다고 했어! 지훈은 얼룩진 셔츠를 감추려 팔짱을 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좀 칠칠치 못해서…”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저 해결하면 될 일.”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마법 지팡이라도 쥔 것처럼 우아한 몸짓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훈의 셔츠 위로 쏟아졌던 커피 자국이,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처럼 스르륵 다시 컵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헙?!”
지훈은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얼룩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셔츠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깨끗했다. 아니, 원래보다 더 깨끗해진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아침에 입었던 후줄근한 느낌마저 사라지고, 갓 세탁한 듯한 빳빳함이 느껴졌다.
“이, 이게 무슨… 마술입니까?!”
지훈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이런 마술을 눈앞에서 본다고? 혹시 어디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바쁜 학생들만 오갈 뿐이었다.
“마술? 인간의 언어로는 그렇게 표현하는구나. 뭐, 비슷하다고 해두지.” 아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텅 비어버린 컵을 향해 손가락을 다시 한 번 움직였다. 그러자 컵 안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더니, 아까 지훈이 마시려 했던 것과 똑같은 향긋한 커피가 가득 채워졌다. “자, 이걸 마시고 기운을 차려라. 너의 중요한 계획은 망쳐져서는 안 되니까.”
그녀는 커피가 든 컵을 지훈에게 내밀었다. 지훈은 컵을 받아들었지만, 혼란스러움에 얼어붙은 채였다. 커피가 다시 컵으로 들어가고, 새 커피가 생겨났다? 이건 마술이 아니라…
“저, 저기… 그… 혹시… 초능력자세요?”
지훈의 엉뚱한 질문에 아린은 픽,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은방울처럼 맑고 고왔다.
“흐음…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어쨌든, 이제 망설일 때가 아니다. 너의 계획이 시작될 시간이 임박했어.”
아린은 지훈의 등 뒤, 도서관 건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때였다. 지훈의 귓가에 쨍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 ‘발표 10분 전!’ 지훈은 화들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이런, 너무 놀라서 시간을 잊고 있었잖아!
“악! 늦었어요!”
지훈은 급히 아린에게 인사할 틈도 없이 도서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계단을 두 칸씩 오르며 강의실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님은 이미 단상에 서 계셨다. 교수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지훈에게 꽂혔다.
“김지훈 군. 정확히 1분 늦었군.”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가 그만…!”
“변명은 나중에 듣도록 하지. 다음 발표자 김지훈 군, 어서 올라와.”
지훈은 땀을 삐질 흘리며 단상으로 향했다. 다행히 셔츠는 완벽하게 깔끔했다. 아까 그 신비한 여인 덕분이었다. 대체 그녀는 누구였을까. 여전히 의문투성이였지만, 일단은 발표를 마치는 게 우선이었다.
발표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자, 지훈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는 문득 아린의 존재를 떠올렸다. 혹시 아직 거기 있을까? 하는 마음에 아까 그 장소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아… 꿈이었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경험이라, 지훈은 자기가 과로로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들린 커피 컵은 생생하게 존재했다. 심지어 아까와 다르게, 컵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차갑게 식어있던 커피가 다시 따뜻해진 것이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대체… 누구였지?”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무심코 컵 안에 담긴 커피를 바라봤다. 컵 속의 커피는 왠지 모르게 은은한 연보라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려 입을 가져가는 순간, 컵 밑바닥에서 작은 글자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 ‘오늘 밤, 서쪽 탑 아래 정원에서 기다려라.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해주지. – 아린.’
글자들이 마치 마법처럼 형성되는 모습에 지훈은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게 대체 무슨… 서쪽 탑 아래 정원? 그곳은 인적 드문 곳으로, 학교 내에서도 으스스하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밤에 그곳으로 오라니?
“나더러… 오라는 건가?”
혼란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쿵쾅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오늘 아침의 그 놀라운 경험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신비로운 여인 ‘아린’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훈은 화들짝 놀랐다.
“어이, 김지훈! 여기서 혼자 뭐 하냐? 셔츠는 아까 봤을 때보다 더 깨끗해졌네?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냐?”
절친한 친구 동민이었다. 지훈은 들고 있던 컵을 황급히 등 뒤로 숨겼다. 동민의 눈에는 그저 빈 컵으로 보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생각 좀… 어서 가자, 동민아. 배고프다.”
지훈은 서둘러 동민의 팔을 잡아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동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뭐냐, 너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설마 아침에 늦었다고 교수님한테 혼나서 멘탈 나갔냐? 야, 내가 너 대신 점심 사줄게! 빨리 가자!”
친구의 등쌀에 밀려 식당으로 향했지만, 지훈의 머릿속은 온통 아린과 컵 속의 글자들로 가득했다. 서쪽 탑 아래 정원. 오늘 밤. 과연 그는 가야 할까? 아니,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
그날 밤 11시, 지훈은 서쪽 탑 아래 정원에 서 있었다.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음침한 곳이라,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낮에는 꽤나 운치 있던 작은 정원이었지만, 밤이 되니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하아… 진짜 내가 미쳤지. 대체 뭘 기대하고 온 거야…”
오들오들 떨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정원 깊숙한 곳, 희미한 달빛이 닿는 곳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낮의 그 아름다운 여인, 아린이었다. 그녀는 낮에 봤던 평범한 복장이 아닌, 왠지 모르게 고풍스러운 느낌의 짙푸른 한복 차림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자태는 빛났고, 그 신비로움은 더욱 짙어진 듯했다.
“온다고 하더니, 정말 왔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그녀는 낮보다 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왔다. 지훈은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낮에는 그저 신비롭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존재가, 밤이 되니 어쩐지 모르게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그, 그게… 궁금해서요. 대체 당신은 누구세요? 아까 낮에… 그건 대체 뭐였어요?”
지훈의 질문에 아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낮의 은방울 같은 웃음과는 달리, 어딘가 능글맞고도 위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후후… 낮의 경험으로도 부족했나? 좋다. 이 기회에 너에게 나의 정체를 알려주도록 하지.”
그녀는 천천히 지훈에게로 다가왔다. 달빛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비췄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린의 머리 위에서, 뾰족한 무언가가 스윽 솟아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마치… 마치 여우의 귀처럼.
“크, 크헉!”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아린의 허리 뒤쪽에서 풍성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꼬리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꼬리.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그 꼬리는, 마치 아홉 개처럼 보였다.
“놀랐나? 인간의 눈으로 직접 보니, 제법 볼만하겠지.”
그녀는 자신의 귀와 꼬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순식간에 그녀의 아름다움은 신비로움을 넘어선 경외감과 공포로 변했다.
“구… 구… 구미호…?”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전설 속에서만 듣던, 인간의 간을 빼먹는다는 그 구미호가 눈앞에 서 있다니! 그의 심장은 널뛰기하듯 발광했고,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후후, 정답. 나는 구미호, 아린이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나의 종족을 그렇게 부르더군.”
아린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낮보다 훨씬 깊고 형형했다. 지훈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네가… 네가 왜 여기에… 그리고 나한테 왜…!”
“왜냐니? 글쎄. 흥미가 생겼다고나 할까. 어리석지만 순수하고, 미련하지만 제법 끈기 있는… 너 같은 인간은 흔치 않으니까.”
아린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지훈의 뺨으로 향했다. 지훈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지훈의 몸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게다가… 꽤나 맛있는 기운을 품고 있더군. 너의 심장.”
아린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울렸다.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나는 듯했다. 지훈은 숨을 헙 들이켰다. 맛있는 기운? 심장? 혹시… 정말로 내 간을 노리는 건가?
“서, 설마… 내 간을…!”
지훈의 비명 같은 외침에 아린은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간? 하하하!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 시대에 누가 그런 구닥다리 방식으로 에너지를 취한단 말인가. 게다가 너의 간은, 내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내가 탐내는 건… 너의 영혼에 담긴 기운이다.”
아린은 지훈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떼고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방금 겪은 그 모든 혼란은… 나의 장난이었다. 너의 기운이 평범한 인간치고는 꽤나 흥미로웠거든. 그런데 막상 대면해 보니… 예상보다 더 재미있군.”
“재, 재미있다니… 장난…?”
지훈은 기가 막혔다. 난 죽을 뻔했는데! 아니,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장난.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장난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나의 정체를 알아버렸으니, 너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아린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그 빛 속에는 묘한 매혹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너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 금지된 인간 세상에서, 나를 안내하는 나의 동반자로.”
“네? 동반자요? 저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데요? 그리고 저… 당신이 구미호라는 걸… 비밀로 해야 하는 거죠?”
지훈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의 존재가 인간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리고 나의 가족들도 탐탁지 않게 생각할 테고. 하지만 걱정 마라. 내가 널 책임질 테니.”
책임? 책임진다고? 지훈은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전설 속의 구미호가 눈앞에 나타나서, 자기보고 ‘동반자’가 되어달라니. 게다가 ‘금지된 사랑’이라니! 이제 막 썸이라는 것도 제대로 타보지 못한 자신에게, 종족을 초월한 금지된 사랑이라니!
“자, 그럼. 나의 동반자여. 앞으로 잘 부탁한다. 김지훈.”
아린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웠고, 동시에 섬뜩했다. 지훈은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평범한 대학 생활은, 오늘 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아주, 아주 혼란스럽고 기묘한 방향으로. 그들의 금지된 로맨틱 코미디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