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441화

새하얀 눈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킨 듯 고요했다. 오래된 비닐하우스 지붕 위로 쌓인 눈은 묵직한 침묵으로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 아래 파묻힌 시간의 흔적들은 더욱 깊은 정적 속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한하윤은 차가운 손으로 목도리를 더욱 끌어올리며 낡은 대문 앞에 섰다. 겹겹이 쌓인 눈밭을 헤치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기대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몇 주 전, 엉망이 된 서재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낡은 나무 상자. 그 안에는 바래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어린 하윤과 은찬이,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눈송이가 탐스럽게 내려앉은 기이한 형태의 나무. 사진 뒷면에는 서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약속’.

그 한 장의 사진이 하윤의 지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려 할 때마다 찾아오는 두통과 어지럼증은 그녀를 더욱 이 오래된 집으로 이끌었다. 모든 답은 이곳,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외딴집에 있을 것이라고, 그녀의 심장이 쉬지 않고 속삭였다.

하윤은 굳게 닫힌 대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가 눈 덮인 정적을 갈랐고, 그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익숙한 그림자가 눈보라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사라진 약속의 조각

“여기까지 왜 온 거야, 하윤아.”

낮고 갈라진 목소리. 이은찬이었다. 그는 흙먼지 묻은 작업복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하윤만큼이나 차갑고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체념,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깊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하윤이 이곳에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은찬아… 너도 알고 있었잖아. 이 사진.” 하윤은 코트 주머니에서 구겨진 사진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뭔지,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은찬은 사진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릴 적 치기 어린 장난 같은 거였어. 쓸데없는 기억은 그냥 묻어두는 게 나아. 넌 이제 여기 올 이유 없어.”

“쓸데없다니? 나한텐 아니야!”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머리가 아픈지, 왜 이 집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한지… 알아야겠어. 제발 도와줘, 은찬아.”

은찬은 한숨을 쉬며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울 수 없어. 그리고 돕고 싶지도 않아. 어떤 진실은 영원히 묻어두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

그의 단호한 말에 하윤의 가슴이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했던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서로를 향해 날 선 경계심을 세운 어른들이 남아있었다.

그때, 집 안에서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하윤은 은찬을 지나쳐 마루로 향했다. 낡은 한옥의 미닫이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왔지만, 그 온기는 할머니의 쇠약한 기운을 감추지 못했다.

기억의 조각을 찾아서

“하윤아… 왔느냐.”

할머니는 이불을 목까지 덮고 앉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의 깊은 주름만큼이나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녀의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하윤은 할머니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손을 잡자 차가운 온기가 느껴졌다.

“할머니, 저 기억하고 싶어요. 오래 전에 제가 잊어버린 것들을요. 이 사진… 이게 뭐예요? 왜 은찬이랑 제가 이 나무 앞에서….” 하윤은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사진에 닿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은찬은 문간에 기대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고 복잡했다.

“그 나무… 약속의 나무였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간신히 이어졌다. “아주 오래 전… 네 엄마가 아팠을 때 심었던 나무란다. 네 아비가, 네 엄마가 병을 이겨내면 우리 셋이서 이 나무 아래에서 영원히 함께하자고 약속했었어. 눈이 펑펑 오던 날… 그때 처음으로 약속했지.”

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희미한 영상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흰 눈이 쌓인 마당, 그리고 그 속에서 아빠와 엄마, 어린 자신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그러나 그 장면은 이내 흐려졌다.

“그럼 사진 속 약속은요? 은찬이랑 저는 왜….”

할머니는 하윤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약속은… 그때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네가 너무 힘들어할 때… 은찬이가 해준 약속이야.”

은찬의 몸이 움찔했다. 그는 이제까지 숨겨왔던 어떤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듯, 힘겹게 눈을 감았다.

“은찬이가, 네가 다시 웃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할머니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 나무가 시들지 않도록… 네가 슬퍼할 때마다, 은찬이가 이 나무에 너의 모든 슬픔을 묻어주겠다고… 약속했었지.”

하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은찬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차마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너무나 깊은 그의 상처가 거기에 있었다.

“할머니… 그럼… 엄마의 병… 그게….” 하윤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엄마가 왜…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는 하윤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 하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이불 아래 깊숙이 숨겨두었던, 낡은 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는 조그맣고 투명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병 속에는 붉고 영롱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마치 진득한 눈물 같기도, 핏방울 같기도 한…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액체였다.

“이게… 네 엄마가 마지막으로… 이 약속의 나무 아래에 묻었던 것이란다. 은찬이가… 평생을 지켜온… 네 엄마의 마지막 희망이자… 너를 위한 마지막 약속이었어.”

할머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은찬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유리병 속 붉은 액체는 차가운 방 안에서 홀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하윤의 심장을 조여 왔다. 이것이 대체 무슨 약속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병 속의 액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될지도 모르는 진실이, 겨울 눈꽃처럼 차갑고도 잔인하게 하윤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