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118화

차가운 도시의 공기가 진의 폐부를 찔렀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고층 빌딩이 빚어내는 회색빛 하늘 아래, 그는 벤치에 앉아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은 마치 깨진 거울처럼 산산이 흩어져 있었고, 어떤 조각은 눈부시게 빛나지만 어떤 조각은 섬뜩할 정도로 어두웠다. 매일 밤 꿈에서 헤매던 시간의 파편들이 이제는 낮에도 그의 의식을 파고들어 혼란스러웠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회중시계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과거의 시간을 잃어버린 채 현재를 살아가는 자에게, 시계는 그저 무거운 쇠붙이에 불과했다. 아니, 어쩌면 그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끈일지도 몰랐다. 그는 시계의 뚜껑을 열어 안쪽의 희미한 각인을 더듬었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었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어딘가 간절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때였다. 웅성이는 인파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 코트를 입고, 목에는 붉은 스카프를 두른 채, 살짝 미소 지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 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모든 시선과 소음이 일순간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존재만이 그의 세상에 가득 찼다.

수현.
입술 속으로 터져 나올 뻔한 이름이었다.
그것은 기억의 저편에서, 오랜 잠에서 깨어나 튀어 오르는 이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나는 듯했다가도, 손에 잡힐 듯 흐릿해지는 안개처럼 느껴졌다. 과연 그녀일까. 아니면 또다시 그의 혼란스러운 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일까.

진은 저도 모르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가슴속에서 봉인되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쁨, 슬픔,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망감.
“수현…?”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튀어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붉은 스카프가 살랑였다. 그녀의 눈이 진과 마주쳤다. 순간,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낯설음과 함께, 아주 희미한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저… 혹시 저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진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낮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음색은 틀림없이 그의 영혼을 울리는 소리였다.
“당신은… 수현이잖아. 내… 내 수현이…”
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수현이라는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머릿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잊고 있던 장면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푸른 들판 위에 앉아 함께 별을 세던 밤.
“진, 나중에 우리가 늙으면, 이 별들처럼 영원히 함께하자.”
수현의 속삭임과 함께, 그의 손을 잡던 따뜻한 온기.
그 약속을 위해, 시간을 거슬러야만 했던 이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고통.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그의 절규.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잘린 필름 조각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진은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마를 짚고 휘청거렸다. 너무나 생생한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이 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수현은 당황한 듯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그녀의 손이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닿으려 했다. 그 순간, 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고 떨리는 그의 손이 그녀의 따뜻한 온기를 갈구했다.

“수현아… 나야. 나, 진이야. 우리… 우리 함께였잖아.”
그의 눈에는 고통과 간절함이 뒤섞인 눈물이 고였다. 수현의 얼굴에는 혼란과 함께, 아주 희미한 동정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진의 가슴을 산산이 부숴놓는 칼날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아는 ‘진’이라는 분은… 없어요. 하지만 혹시 제가 아는 누군가와 착각하신 거라면…”

그녀의 말은 그의 심장에 박히는 못과 같았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이전의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을 거스르고, 자신의 존재마저 희생하여 바꾼 운명의 결과일까. 그가 돌아온 이 시간 속에서, 그녀는 그가 알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행복한 삶을. 그가 기억을 잃고 헤매는 동안, 그녀는 그를 지운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은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 뜨거웠던 눈물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왜 자신이 시간 여행을 시작했는지, 왜 기억을 잃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그토록 절박하게 헤매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끝에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지독한 사랑과, 그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지워야만 했던 비극적인 선택이 있었다.

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방금 되찾은 기억 속에서, 또 다른 진실의 조각을 발견했다.
“수현아… 너는…”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뒤편,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유령이자, 모든 기억의 시작점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그들의 재회를 비웃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