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망가진 일상
자정이었다. 선우는 천장의 누런 조명 아래, 차갑게 식은 즉석밥을 포크로 대충 휘저으며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박았다. 좁은 원룸 오피스텔, 24층. 창밖으로는 희뿌연 도시의 불빛들이 흩어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피곤하고,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밤.
띠링.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택배 배송 완료 메시지가 떴다. 굳이 문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새벽 배송으로 시킨 영양제가 문밖에 놓여 있을 터였다. 침대 옆 협탁에 빈 택배 상자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처럼, 선우의 일상은 인터넷과 배달 애플리케이션 없이는 불가능했다.
덜컥.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선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나? 24층까지 바람이 들 리는 없었다. 도어락이 저절로 잠금 해제될 일도 없고.
“뭐야…”
선우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겠지. 아니면 옆집 늦은 귀가 소리가 울렸거나. 이 건물은 방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분명히 닫아놓았던 베란다 창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고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 선우는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올렸다. 추운 날씨에 창문을 열어둘 리 없었다. 게다가 방범창까지 굳게 잠겨 있었다. 설마… 강도?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휴대폰 불빛을 비춰봤다. 베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범창도 그대로였다.
“미쳤나 봐, 이선우.”
피곤이 뇌를 갉아먹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신병의 초기 증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 그래, 충분한 수면이.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선우는 식탁 위에 놓인 컵을 보고 굳어버렸다. 어제 밤 분명히 물을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넣어두었었다. 하지만 지금, 컵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어제 물을 마신 그 자리, 그 모양 그대로. 마치 누군가 자신이 마신 컵을 다시 갖다 놓은 것처럼.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애써 합리화했다. 어제 너무 피곤했으니까. 잠결에 다시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지. 싱크대가 꽉 차 있어서 무심코 식탁에 올려두었을 수도 있고. 그릇을 치우며 고개를 젓는데, 냉장고 문이 저절로 덜컹거렸다.
쿵! 쿵! 쿵!
마치 안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선우는 움찔하며 냉장고를 노려봤다. 오래된 냉장고는 아니었지만, 가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고장났나?”
가까이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봤다. 아무 이상 없었다. 쿵, 소리가 멈췄다. 선우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냉장고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가전제품 수명이 다한 거겠지.
이 이상한 일들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데, 불이 갑자기 깜빡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켰다 껐다 반복하는 것처럼. 선우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야겠네.”
밤에는 더 심했다. 거실에 불을 켜놓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분명 꺼져 있던 TV가 저절로 켜졌다. 그것도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화면으로. 마치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옛날 텔레비전처럼.
처음에는 리모컨이 잘못 눌렸나 싶어 리모컨을 찾아봤지만, 리모컨은 늘 두는 자리, 침대 옆 협탁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다시 끄면 잠시 후 또 다시 켜졌다. 지지직거리는 화면과 함께.
선우는 결국 TV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러자 그날 밤은 조용했다. 겨우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늦잠을 자고 일어난 선우는 거실로 나섰다. 전날 밤, 얌전히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과일 바구니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사과 하나가 바구니에서 굴러 떨어져 소파 밑에 박혀 있었다.
“이게 뭐야…!”
선우는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현관문도 마찬가지였다. 도둑이 들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등골이 오싹했다. 어제 밤, 분명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과일 바구니가 저절로 바닥에 떨어질 일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집어 던진 것처럼.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스툴 의자가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끽- 끽- 하고 마룻바닥에 마찰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선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비볐다. 헛것이 보인 걸까? 아니. 분명히 스툴 의자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멈칫하더니, 다시 끽-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두어 뼘 가량 밀려났다.
“누, 누구 있어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부엌 싱크대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제 저녁을 먹고 설거지해 엎어놓았던 접시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흐악!”
선우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파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환각도 아니었다.
냉장고 문이 다시 한번 쿵, 쿵, 쿵, 하고 격렬하게 두드려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거칠게. 마치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쾅! 마지막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새로 검붉은 액체가 새어 나왔다. 마치 핏물처럼.
선우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고 역겨웠다. 끈적한 검붉은 액체는 냉장고 바닥을 타고 흘러나와 서서히 거실 바닥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위로, 스툴 의자가 다시 한 번 끽- 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선우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마치 누군가 그 의자에 앉아서 선우를 노려보는 것처럼.
선우는 더 이상 이 공간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손에 잡히는 대로 현관문 쪽으로 달렸다.
“나가야 해… 나가야 해…!”
가방도, 휴대폰도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 하나만 남았다.
현관문에 다다르자, 어제 밤 잠금 해제 소리가 났던 도어락이 스스로 잠금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하고 잠금장치가 내려가는 소리.
선우는 덜컥거리는 손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세 번 연속으로 틀렸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아니야! 내가 뭘 잘못 누른 거야? 다시!”
다시 침착하게 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또 틀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으드득, 하는 뼈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깨진 접시 파편들과 검붉은 액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를 형성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액체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선우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마치 사람의 형상을 띠려는 듯한 무언가가 불거져 나왔다가 다시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서 나는 듯한 역겨운 냄새와 함께 선우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도어락에서는 삑- 삑- 삑- 경고음이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비밀번호 입력 제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갇혔다.
선우는 공포에 질린 채, 다시 현관문을 부여잡았다. 문고리를 돌리고, 몸으로 밀치고, 발로 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썩어가는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등 뒤의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리로…*
*나가지 마…*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괴하고 음산한 소리였다.
선우는 울부짖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 삑- 삑-
그리고 이어서,
띠리링- 하고, 마지막으로 잠금장치가 완전히 굳어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뒤편에서, 검붉은 액체와 파편의 그림자가 거대한 물결처럼 일렁이며 선우의 발끝을 집어삼켰다. 차갑고 끈적한 감각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 아파트에, 이 도시에 찾아왔다는 끔찍한 예감에, 선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침묵.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차갑고 끈적한 액체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만이 선우의 뇌리를 지배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