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마른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눅눅하게 들려왔다. 시아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품은 온기로 가득했었다. 류진의 품. 완벽한 사랑이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렇게 깊고 뜨거운 애정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매번 그 행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불안은 더욱 선명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돋아났다.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시아, 왜 그렇게 창백해?”
어제 아침, 류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에 닿았던 순간의 섬뜩한 차가움을 기억했다. 그는 완벽한 체온을 가졌을 텐데, 왜 유독 그 순간만은 달랐을까?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난밤, 열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을 때, 아주 희미하게, 피어나는 꽃향기와는 전혀 다른, 낯선 비릿함이 스쳤다. 마치 오래된 금속의 녹 냄새 같기도, 아니면 차갑게 식어버린 핏방울 같기도 했다. 시아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예민한 거야. 류진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배려심 깊고, 그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자. 그의 미소는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 같았고,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파도처럼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의 모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시아는 무심코 베개 위를 더듬었다. 푹신한 감촉 아래, 손끝에 아주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톱만 한 크기였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빛 조각. 마치 작은 수정 비늘 같기도 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장자리는 날카롭게 잘려나간 듯했고, 표면은 매끄러웠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 조각. 지난주, 류진의 셔츠 어깨에 똑같은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먼지려니, 아니면 옷에 박힌 장식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이 베개 위에서 다시 마주한 이것은 단순한 먼지도, 장식도 아니었다.
시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각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검색창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이내 멈췄다. 무엇을 검색해야 할까? ‘푸른빛 비늘’? ‘이상한 물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대신 류진의 휴대폰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휴대폰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샤워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한 번은 그녀가 실수로 그의 휴대폰을 만졌을 때,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기억이 있었다. 금세 다정한 미소로 바뀌었지만, 그 찰나의 표정은 시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마치… 침범당해서는 안 될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를 보는 듯한 눈빛.
“시아? 아직 자고 있었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타이밍. 시아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서랍을 닫고 침대에 앉아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응, 잠깐 졸았어.”
류진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사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시아가 좋아하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피곤했나 보네. 오늘은 일찍 들어왔으니,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그가 다가와 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따뜻했지만, 어쩐지 그 따스함 속에 아주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방금 전 발견한 푸른 조각 때문일까?
“류진…” 시아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가끔씩…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류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무슨 소리야, 시아. 나는 그냥 너를 사랑하는 남자일 뿐인데.”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시아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그의 가슴에 댔다. 두근, 두근… 규칙적인 박동. 그러나 어쩐지 그 소리가 깊은 물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가끔씩… 네 눈이 너무 깊어서, 내가 그 안에 빠져버릴 것 같아.”
시아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속삭였다. 류진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아름다운 밤하늘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냉기가 숨어 있었다.
“너는 이미 내 안에 빠져 있지, 시아. 너도, 나도, 서로에게 너무 깊이 물들어버렸어. 되돌릴 수 없어.”
그의 목소리가 낮고 감미롭게 울렸다. 사랑스러운 말이었지만, 시아는 그 안에 숨겨진 지독한 집착과 소유욕을 읽어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손바닥은 부드러웠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류진은 그녀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완벽했지만, 그 순간 시아는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사냥감을 꿰뚫어 보는 포식자의 미소처럼.
“네가 원하던 곳으로 데려갈 거야, 시아. 영원히.”
영원히. 그 단어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순간적으로 그의 셔츠 소매 끝에 닿았다. 아주 희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푸른빛 조각 하나가 그의 소매 안쪽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까 베개 위에서 발견했던, 그 아름답지만 낯선 조각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류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방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듯했다.
“시아.”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시아는 공포에 질려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하는 연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이 처한 끔찍한 진실을 읽어냈다.
“너… 너는… 누구야?”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류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차가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그의 손이 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나 그 손길은 부드러움을 가장한 쇠사슬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은 심연으로 변해갔다. 그 안에 별들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다시 번졌다. 이번에는 더 이상 완벽함을 가장하지 않은, 순수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었군, 내 작은 별.”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게 울렸다. 그 소리는 시아의 귓가에서 울리는 동시에, 그녀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 얼려버리는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피부 위로, 방금 전 베개 위에서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푸른빛 조각들이 희미하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늘이었다.
그의 뺨, 목덜미, 그리고 그녀를 감싼 그의 손등 위로, 차가운 푸른빛 비늘들이 아름답지만 섬뜩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시아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달콤했던 사랑, 그가 속삭였던 모든 약속들, 이 온기로 가득했던 방, 이 모든 것이 그가 쳐놓은 덫이었다.
그녀의 눈에 절망이 가득 찼다.
류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방안의 모든 빛이 그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를 휘감는 것은 오직 차갑고 낯선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녀의 등 뒤로, 무언가 거대하고 비릿한 날개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창문 밖으로 맹렬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 폭풍은, 이제 막 그녀의 심장 안에서 시작된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