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수 없는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뼈 무덤이었다. 한때 생명으로 들끓었을 아스팔트 위에는 찢겨진 현수막과 뒤집힌 차량들, 그리고 굳어버린 핏자국만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유나는 녹슨 쇠막대기로 발밑의 잔해를 툭툭 건드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땀으로 끈적이는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습하고 눅진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신경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지붕이 무너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이 턱하니 버티고 선 곳.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가 이제는 죽음의 정적만이 흐르는 미로가 되어버렸다. 유나는 며칠째 식량도,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그녀의 배는 얄밉게도 꼬르륵 소리를 냈다. ‘젠장, 이 지긋지긋한 허기는 대체 언제쯤이나 익숙해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아…”

얕은 한숨이 폐 속의 탁한 공기를 밀어냈다. 이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살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를 발견해 잡아먹으려는 괴물들의 놀이터일 뿐. 유나는 허리에 찬 낡은 등산용 칼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녹이 슬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였다.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흩뿌려진 상점 안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오래된 약품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선반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병 조각과 찢긴 포장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쩌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어도 먹을 만한 통조림 하나라도 있을지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버틸 수 있는 약이라도.

그녀의 눈길이 가장 깊숙한 진열대 아래, 먼지 쌓인 틈새로 향했다. 그곳에 작고 낡은 상자 하나가 보였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자, 얇은 먼지층 아래로 캔 모양의 그림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젠장… 빈 깡통이잖아.”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절망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캔을 던져버렸다. ‘끼이익- 철컥.’ 그때, 건물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즉시 몸을 낮추고 칼을 움켜쥐었다. 괴물일까?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

숨을 죽이고 소리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문을 지나 안쪽 복도로 들어섰다. 텅 빈 공간, 어두컴컴한 구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나는 긴장감에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 번,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흐느끼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였다.

괴물들의 소리는 아니었다. 괴물들은 그렇게 조용히 흐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으르렁대고, 썩은 숨을 내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달려들 뿐이다.

유나는 망설였다. 동료는 짐이었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은 곧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지난날의 뼈아픈 경험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흐느낌은 계속됐다. 마치 버려진 새끼 동물처럼, 처절하고 나약한 소리였다.

결국, 유나는 이성을 잠식하려는 냉정함을 뿌리치고 소리를 따라갔다. 어두운 공간 깊숙한 곳,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작은 형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 있어?”

유나의 목소리는 제법 차분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작은 형체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먼지투성이의 얼굴, 눈물이 말라붙은 뺨, 그리고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 아이였다. 대략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 되었을까.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하고 말라붙은 작은 아이.

아이는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경계심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같은 것이 그 눈에 교차했다.

“너… 혼자니?” 유나가 다시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유나는 잠시 칼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럴 힘조차 없는 듯했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

유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탓에 조금 거칠게 나왔지만, 아이는 그 안에 담긴 미약한 온기를 느꼈는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겨우 한 글자씩 내뱉었다.

“민… 준…”

민준. 유나는 그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민준은 너무나 지쳐 보였다. 탈수와 영양실조가 심해 보였다. 이대로 두면,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먼저 쓰러져 죽을 터였다.

유나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할까? 아니면…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치던 여동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괴물들에게 찢겨나가던 여동생의 마지막 비명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나는 고개를 흔들어 끔찍한 기억을 쫓아냈다.

“따라와.”

유나는 짧게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에 희망의 빛이 스며드는 것을 유나는 보았다.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작고 마른 손은 차가웠다. 유나는 자신의 체온으로 그 작은 손을 감쌌다.

어느새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건물 잔해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어,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밤은 괴물들의 시간이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유나는 민준을 이끌고 상점 밖으로 나왔다. 잿빛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민준은 유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아이의 발걸음은 힘겨워 보였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잡고 따라올 뿐이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주택가를 지나 넓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부서진 다리가 저 멀리 보였다. 다리를 건너면, 어쩌면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있었다. 민준은 아까부터 물이 마시고 싶다는 듯 입술을 핥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버텨.” 유나는 민준에게 속삭였다.

그때였다. 도로 건너편에서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뛰었다. 저 소리는… 무리였다. 괴물들의 무리. 유나는 민준의 손을 꽉 잡았다.

“민준아, 절대 소리 내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민준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재빨리 도로 옆에 버려진 트럭 아래로 몸을 숨겼다. 트럭의 낡은 철판이 차가웠다. 먼지 냄새와 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했다.

괴물들의 무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뼈가 드러난 형체들이 느릿하게, 하지만 끈질기게 발을 끌며 움직였다. 끔찍한 신음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십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목적지를 정한 듯 한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의 시선은 트럭 쪽이 아니었다.

유나는 민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이는 유나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유나는 민준의 등만 규칙적으로 쓸어주며 숨을 죽였다. 언제쯤 이 끔찍한 행진이 끝날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길고 긴 정적이 다시 찾아왔을 때, 유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괴물들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가도 돼.”

그녀는 민준을 일으켜 세웠다. 민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건너자,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착각일까? 이런 폐허에서 불빛이라니. 하지만 민준의 눈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누나… 저기… 빛이 나.” 민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는 다시 한 번 희망의 끈을 부여잡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곳에.

그들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 불빛을 향해 걸었다. 불빛은 꺼질 듯 말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다름 아닌 낡은 건물이었다. 과거에는 병원이었던 곳 같았다. ‘안전지대’라기에는 너무나 허술해 보였지만, 적어도 지붕과 벽은 온전히 서 있었다.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누구야?!”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는 재빨리 칼을 겨눴다. 그녀의 앞에는 깡마른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도 낡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그냥 길을 잃은 사람이야.” 유나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남자의 몽둥이와 그 뒤의 어둠을 번갈아 살폈다. 혼자가 아니길 바랐지만, 동시에 더 많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계심도 놓지 않았다.

남자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을 훑어보더니 이내 몽둥이를 내렸다. “아이도 있군. 여기는… 그냥 폐허야. 아무것도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불빛이 나는 것을 보면, 그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우리는… 물이라도 한 모금만 있으면 돼.” 유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그는 그들을 이끌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좁은 복도를 지나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낡은 간이침대 몇 개와 함께 두어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모두 지치고 피폐해 보였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보였다.

구석에 놓인 양동이에 고여 있던 물을 얻어 마셨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목마름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했다. 민준은 허겁지겁 물을 마시더니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도 물을 마셨다. 며칠 만에 맛보는 물이었다. 생명의 물이었다.

그날 밤, 유나는 민준을 품에 안고 낡은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민준은 유나의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시 얻은 안도감 때문인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유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왔다. 이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내일이 되면 또다시 식량을 찾아 나서야 하고, 괴물들을 피해 숨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임시방편일 뿐, 내일 아침에는 다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품에 안긴 민준의 작은 온기가 차가운 그녀의 마음에 따뜻한 불씨를 지펴 주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계속 싸워야 했다. 절망의 끝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유나는 민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흔들리면서도,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그들은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다.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