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수련장의 돌담을 휘감았다. 고요함 속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천하제일 무도회의 결전. 하지만 이번 대회는 여느 때와 달랐다. 승리자의 이름이 천하에 떨쳐지는 축제가 아니라, 패배자의 그림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절벽과도 같았다.
백무진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폐부 깊숙이 차오르는 기운은 맑았으나, 그의 내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지난밤, 꿈속에서 본 광경은 여전히 생생했다. 검은 바다, 그 위로 솟구친 거대한 형상. 그리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텅 비어 있으나 압도적인 눈동자.
“정말로… 그분의 강림을 막는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귓가에도 낯설게 들렸다.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그것’이 깨어나고 있다는 징조는 이미 여러 문파의 고문서에서 예견된 바였다. 그리고 이 무도회는, 단순한 무예의 겨룸이 아니라, 그 잠든 신성을 봉인할 마지막 희생양을 고르는 의식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무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눈을 뜨자, 대회장으로 향하는 통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 웅장한 기둥들, 그리고 그 너머로 들려오는 수만 관중의 웅성거림. 압도적인 규모였지만, 백무진의 시선은 저 멀리, 대련장 중앙에 우뚝 선 흑요석 비석에 고정되었다. 그 비석에는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알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무림의 전설들은 저 비석이 ‘세상의 경계’를 나타낸다고 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림자처럼 묵묵한 도우미뿐이었다. 통로를 지나 대련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백무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그의 등을 꿰뚫는 듯했으나, 그는 오직 앞에 선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다.
“백무진… 오랜만이군.”
상대는 청룡검(靑龍劍) 장천이었다. 푸른 도포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의 허리춤에는 이름처럼 푸른빛이 감도는 명검이 매달려 있었다. 장천은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는 인물.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푸른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보통 같으면 존경과 경의를 표할 만한 상대였으나, 백무진의 눈에는 그의 뒤편에서 아른거리는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보였다. 환영일까, 아니면…
“장천 대협.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백무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네 역시 예전보다 더욱 강해진 듯하군. 허나, 이번 대회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아마도 이 승부가 그리 달갑지는 않을 걸세.” 장천의 눈빛은 깊고,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그 역시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드디어 울려 퍼졌다. “자, 그럼! 천하제일 무도회 4강전! 무림의 백발마신(白髮魔神), 백무진! 그리고 검왕(劍王) 장천 대협의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징이 굉음과 함께 울리자, 수만 명의 함성은 순식간에 정적으로 변했다. 오직 바람 소리만이 대련장을 가로질렀다. 백무진은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은 마치 늙은 나무의 뿌리처럼 땅에 단단히 박혀 있었으나, 상체는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장천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허리에서 청룡검이 번개처럼 뽑혀 나왔다. 푸른 검날이 섬광을 그으며 백무진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단순한 검격이 아니었다. 푸른 기운이 검날을 휘감아 회오리쳤고, 그 안에 담긴 맹렬한 기세는 바위마저 두 동강 낼 듯했다. 그 검 끝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바다 내음이 풍기는 것 같았다.
백무진은 눈을 감았다. 들려오는 것은 오직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뿐.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잔상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거의 기억,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던 알 수 없는 속삭임들.
*“모든 것은 하나에서 비롯되었고, 하나는 다시 모든 것을 집어삼키리라…”*
그 속삭임이 현실의 검격과 겹쳐지는 순간, 백무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무영신보(無影神步)’.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그 보법으로, 그는 장천의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크으읍!”
장천의 검이 허공을 갈랐고, 푸른 기운이 대련장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백무진은 이미 그의 뒤편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떤 무기도 없었으나, 그의 주먹에서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기파(氣波)가 뿜어져 나왔다.
“무진결(無盡訣), 제 일식… 파산(破山)!”
백무진의 주먹이 휘둘러지자, 대기마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기파는 단순히 장천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련장 전체의 기류를 뒤흔들고, 관중석에 앉은 이들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묘하게도, 이 기파 속에서 차가운 심해의 물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장천은 감지했다. 이 기파는 무력(武力)의 영역을 넘어선, 어떤 근원적인 압력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청룡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푸른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검날에 집중되었고, 마치 살아있는 용이 솟구치는 듯한 형상이 만들어졌다.
“청룡검결(靑龍劍訣), 용천(龍天)!”
두 거대한 기운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앙! 폭발음이 대련장을 뒤흔들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대련장 바닥의 흑요석 판들이 여기저기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고, 몇몇은 공포에 질려 눈을 가렸다. 그들의 귀에는 이명(耳鳴)처럼 기이한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장천의 푸른 도포는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청룡검의 검날은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백무진 역시 미동도 없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백무진… 자네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초월했군.” 장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경의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대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무진은 시선을 돌려 대련장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기운이 충돌했던 자리, 금이 간 흑요석 판 아래에서 옅은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지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악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은 기운은 비석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을 따라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 순간, 백무진의 머릿속에 다시금 그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보아라… 너희의 힘이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을 통해 내가 춤추리라…”*
백무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대결은… 그분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분들의 치열한 싸움이 지면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을 통해 ‘그것’이 세상으로 나오려 하는 것이었다. 장천이 지금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의 무공에 깃든 어떤 불길한 힘, 그가 알지 못하는 심연의 속삭임이 장천의 의식 깊은 곳을 침투하고 있었다.
“장천 대협! 잠시 멈추시오!” 백무진이 급히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장천은 이미 백무진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초점을 잃고 멍한 빛을 띠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기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파문이 그 푸른 빛을 잠식하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경직되었고, 입술은 마치 굳어버린 점토 같았다.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낮고 굵으며, 동시에 텅 빈 듯한 울림. 깊은 해저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목소리는 모든 관중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그의 손에 들린 청룡검이 검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 검날 위로 시커먼 균열들이 거미줄처럼 번져 나갔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셀 수 없는 작은 눈들이 번뜩이는 환영이 백무진의 시야를 강타했다.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질렀다.
백무진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것’이… 장천의 무공을 통해 현현하려 하고 있었다. 이 무도회는 단순한 결투가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된, 세계를 침식할 거대한 의식이었던 것이다.
“크툴루…” 백무진은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검은 빛을 내뿜는 청룡검이 다시금 백무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질서마저 뒤틀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검의 궤적은 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혼돈 그 자체였다. 마치 심연의 촉수가 하늘을 휘젓는 듯한 광경이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백무진은 깨달았다. 이 대결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오직, 모든 것을 집어삼킬 심연의 맹세, 그 뿐이었다. 그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장천, 아니, 장천의 육신을 잠식한 그 미지의 존재를 응시했다.
“감히… 이 천하를 더럽히려 하는가!”
그의 몸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기운이 아니었다. 백무진의 심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태고의 비전이 마침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갈 듯 팽창하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그의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압축되었다.
심연의 맹세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