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님, 커피 다 되었습니다. 인공 지능, 오늘은 좀 느리네요. 아니면 제가 너무 빠른 건가?”
홀로그램 콘솔 너머, 엔지니어 ‘키르’가 이죽거렸다. 그의 합성 섬유 유니폼은 한때 선명했던 라임색이었으나, 3광년이 넘는 항해 끝에 희미한 형광빛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낡고 해진 팔꿈치에는 기계 오일 자국이 선명했다. ‘하데스-7’호의 함교는 희미한 비상등과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의 푸른빛만이 명멸하는 공간이었다. 광활한 우주의 어둠 속을 끊임없이 미끄러져 가는 작은 강철 고래. 그게 바로 이 함선의 존재 이유였다.
선장 ‘카이’는 묵묵히 손짓하며 키르가 내미는 금속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합성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순간, 옅은 씁쓸함이 뇌를 깨웠다. “키르, 인공 지능은 네 덕분에 과부하가 걸렸을 거다. 하루 종일 혼잣말에 농담 따먹기… 전력 낭비가 심해.”
“선장님, 저의 주옥같은 유머는 함내 사기 진작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공 지능도 가끔은 감탄한다니까요?” 키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함교 한구석에서 정적을 깨는 ‘삑’ 소리가 울렸다. 항해사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피곤에 지친 눈은 홀로그램 항로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선장님, 이상 신호입니다. 심우주망원경이 뭔가 포착했어요. 코어 섹터 델타-9 구역, 기존 항로에서 살짝 벗어난 곳입니다.”
카이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엘리시아의 콘솔로 다가갔다. “뭔데? 소행성? 성운 잔해?”
“아닙니다. 어떤 에너지 방출인데… 기존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패턴이에요. 아주 희미하지만, 지속적입니다. 파장도 일정하고요. 자연 현상 같지는 않습니다.” 엘리시아의 음성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실렸다.
함교의 분위기가 일순간 달라졌다. 지루했던 일상이 찢어지고, 미지의 장막이 걷히는 듯한 느낌. 키르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도 사라졌다. “인공적인 신호라고요? 이 먼 곳에서?”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것 같아요.” 엘리시아의 손가락이 공중의 키보드를 빠르게 움직였다. 데이터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추정컨대, 수십억 년은 된 것 같습니다.”
수십억 년. 그 단어에 함교는 다시 한번 침묵에 잠겼다. 인류가 우주에 발을 내디딘 지 겨우 수천 년. 그보다 훨씬 오래된 문명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항로 변경. 대상의 위치로 이동한다. 속도는… 최대 안전 속도로.”
“선장님!” 엘리시아가 짧게 외쳤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미지의 존재일 수도….”
“그 미지의 존재가 우리가 찾던 해답일 수도 있다, 엘리시아.” 카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지? 그저 광물을 캐러 온 건 아니잖아. 인류의 유산을 찾기 위해서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히 자원 채굴이 아니었다. 오랜 전쟁과 환경 파괴로 병들어가는 지구를 살릴 ‘무엇’을 심우주에서 찾아내는 것. 잊혀진 문명의 기술이든, 새로운 에너지원이든, 인류를 구원할 단서를 찾는 것이 ‘하데스-7’호의 진짜 목표였다.
“엔지니어, 선체 전체 점검. 특히 쉴드와 무장은 언제든 가동할 수 있도록 대기시켜라.” 카이가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오랜만에 흥미진진한데요?” 키르의 목소리에는 다시금 활기가 돋았다. 그의 손이 홀로그램 콘솔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엔진이 윙 하는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었다.
수십 시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신호의 근원지에 도달했다. 암흑 우주 한가운데, 망원경으로도 겨우 포착되던 희미한 점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장님, 시각 정보 확인. 거대합니다. 그리고… 저건….”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경외심과 함께 미약한 공포가 섞였다.
주함교의 대형 스크린에 미지의 물체가 확대되어 나타났다. 거대한 검은색 다면체였다. 매끄럽고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마치 수억 개의 결정이 불규칙하게 얽혀 있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빛을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어둠을 흡수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어떤 각도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다가, 또 다른 각도에서는 단단한 암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연결 부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그러나 동시에 가장 완벽한 인공물처럼 존재했다.
“믿을 수 없어….” 키르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어떻게 이런 게… 누가 만든 거지?”
카이는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동시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과학 장교는? ‘리오’는 어디 있지?”
“지금 바로 호출하겠습니다, 선장님!” 엘리시아가 급히 통신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 장교 ‘리오’가 함교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와 안경은 잠에서 막 깬 듯한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이거… 미쳤군요. 선장님,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제 모든 지식 체계를 부정하는 존재예요.”
리오의 흥분은 전염성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콘솔 앞에 앉아 온갖 스캔 데이터를 띄웠다. “물질 구성이… 특이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원소 조합으로도 설명되지 않아요. 상식적으로는 저런 밀도로 저런 형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에너지 방출은요?” 카이가 물었다.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일정한 파장의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습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요. 주기는 5분 13초… 이건… 의도적인 방출입니다. 그리고….” 리오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제 신경계가… 이상 신호를 보내요.” 리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두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주파수 간섭 같아요. 무언가가 제 뇌를 자극하는 듯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함교 전체가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스크린에 비치던 미지의 다면체에서 옅은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함선의 내부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
“쉴드에… 쉴드에 이상 신호 감지! 선체 외부 센서가 오작동합니다!” 엘리시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젠장, 대체 저게…!” 키르가 소리쳤다.
푸른 섬광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남아있었다. 함교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들이 무작위로 번쩍였고, 일부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내며 꺼졌다.
카이는 침착하게 명령했다. “접근 정지! 비상 전원 전환! 모든 시스템 수동으로 돌려!”
리오의 눈이 번뜩였다. “선장님, 저건… 반응한 겁니다. 우리가 다가가자… 저 유물이 우리에게 반응했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대형 스크린 속 다면체는 다시 고요하게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고요함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거인이 눈을 떴음을 알리는 조용한 경고와 같았다. 함선의 모든 승무원들은 숨죽인 채, 저 심연의 어둠 속에서 깨어난 미지의 존재를 응시했다. 이 만남이 인류에게 구원이 될지, 아니면 파멸의 서곡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