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강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위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발아래로는 어둠이 집어삼킨 골짜기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벌써 3년. 처음엔 마물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웬만한 위험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베테랑 모험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그의 경험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도에선 이런 곳이라고 안 했는데.”

낮에 찾았던 고대 유적의 흔적은 밤이 되자 더욱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인간의 발길이 닿은 지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폐허, 그 한가운데에 빛 한 줄기 없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강현은 혹시라도 마족의 잔재라도 남아 있을까 싶어 허리춤의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는 이 세계의 지식을 꽤 쌓았지만, ‘어둠 실 잣는 자’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 인간과는 상종 못 할 어둠의 권속. 그들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 강현의 심장을 짓눌렀다.

바위틈을 비집고 나아가자, 이내 동굴로 이어지는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는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묘한 보라색 꽃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꽃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한 심장 박동처럼 깜빡였다.

“크윽…!”

갑자기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현은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그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외쳤다.

“공간 도약!”

강현의 몸이 푸른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가, 곧이어 수십 미터 아래 동굴 바닥에 나타났다. 간신히 낙하 피해를 피했지만, 착지는 완벽하지 못했다. 왼쪽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젠장, 어깨가 빠진 것 같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천장에는 광석들이 박혀 있어 희미한 푸른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 아래로 기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솟아 있었다. 그리고 공동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색 수정이 박힌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주위로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앞에서 한 여인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곳의 모든 어둠을 한데 모아 빚어낸 듯했다. 칠흑 같은 긴 머리카락은 폭포처럼 등 뒤로 흘러내렸고, 매끄럽고 창백한 피부는 달빛 아래의 진주처럼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는 강현을 향해 일순간 섬뜩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접힌 검은 날개가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둠 실 잣는 자…!’

강현은 숨을 들이켰다. 전설 속 존재를 이렇게 직접 마주할 줄이야.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수정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옥죄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는 검은 사슬이 얽혀 있었고, 가느다란 목에는 은빛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강현을 향한 경계심과 함께 깊은 절망을 담고 있었다.

“인간…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지만, 묘한 울림이 있었다. 마치 수천 년 된 고목의 속삭임 같았다.

강현은 어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를 관찰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녀를 해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지된 의식인가, 아니면 일종의 속박인가?

“당신… 괜찮습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합니까?”

그의 말에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움이 필요하냐고? 이 고통스러운 의식 속에서? 인간이 감히 자신에게?

“건방진… 인간 주제에… 감히 나의 고통을… 가늠하려 들다니.”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검은 날개가 살짝 펴지며 강현을 향해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어둠의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엘리시아. 어둠 실 잣는 자의 왕녀다. 네놈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당장 여기서 꺼져라!”

엘리시아. 어둠 실 잣는 자의 왕녀. 강현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인간과 어둠 실 잣는 자는 수천 년간 적대 관계였다. 이런 존재를 마주한 것도 기적이었지만, 그녀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를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서 강현은 섬뜩한 적의보다는 깊은 슬픔과 고통을 보았다. 마치 거대한 짐을 홀로 짊어진 듯한 고독한 모습.

“왕녀님이라고 불리시는 분이… 그런 사슬에 묶여 고통스러워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제가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강현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갔다. 어깨의 통증이 심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네놈이 어둠에 물든 존재가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것이지?”

엘리시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날개 끝에서 검은 실타래 같은 어둠이 뻗어 나와 강현의 발밑을 휘감으려 했다.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닌 것 같네요. 지금 당신은…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입니다.”

강현은 휘감아 오는 어둠의 실타래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의 몸에는 이세계에 온 뒤로 생긴 특수한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어둠의 기운에 오염되지 않는, 특이한 성질의 마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저를 죽이려 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엘리시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인간이 자신을 돕겠다고? 게다가 먼저 약속을 요구하다니. 그녀의 가슴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나에게…!”

그녀는 분노와 모욕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육체를 옥죄는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힘은 그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왕녀님.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당신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강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엘리시아는 처음으로 인간의 눈에서 순수한 호의를 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수천 년 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내가 네놈을 죽이지 않을 것을 맹세하마. 그러니… 이 속박을 풀어라.”

그녀의 말에 강현은 망설임 없이 제단으로 다가갔다. 검은 수정 제단은 강한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강현은 제단에 새겨진 문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세계의 고대 언어로 쓰여진 봉인 마법이었다.

“이건… 스스로를 속박하는 저주인가요?”

강현의 질문에 엘리시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네놈이 알 바 아니다. 해제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노력해봐야죠.”

강현은 제단에 손을 얹었다. 그의 마나가 제단으로 흘러들어갔다.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어둠의 기운에 의해 상쇄되었겠지만, 강현의 마나는 오히려 어둠의 기운을 잠식하며 파고들었다. 흡사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듯한 광경이었다.

콰아앙!

갑자기 제단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어둠의 기운이 흩어지며, 엘리시아를 묶고 있던 검은 사슬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은빛 고리도 산산조각 났다.

자유로워진 엘리시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사슬이 사라진 자리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의 어깨는 여전히 탈골된 상태였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왕녀님?”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인간이 자신에게… 이토록 쉽게 도움을 주다니. 그것도 자신들의 종족이 가장 경멸하는 존재가. 그녀의 가슴 속에서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분노, 당혹감, 그리고… 낯선 안도감.

“네놈…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고통이나 위협이 아닌, 깊은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냥… 길 잃은 모험가죠, 뭐. 어깨 좀 맞춰주실 수 있나요? 너무 아파서….”

강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리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를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꺾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그저 순수한 피곤함과 도움을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쳇… 그깟 일 하나 못 처리하는군.”

엘리시아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지만, 강현의 어깨로 다가섰다. 그녀의 차가운 손이 강현의 어깨에 닿았다. 인간의 체온과는 다른 서늘한 감각이 강현의 피부에 전해졌다. 그녀는 뼈를 맞춰 넣는 데 능숙한 듯, 능숙한 솜씨로 어깨를 움직였다.

‘뚜둑!’

“크윽…!”

강현은 짧은 신음과 함께 어깨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이내 고통이 가라앉고 뼈가 제자리를 찾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고맙습니다, 왕녀님. 덕분에 살았네요.”

강현은 다시 활짝 웃었다. 그의 미소는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지하 동굴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 같았다. 엘리시아는 그런 강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삶은 오직 어둠과 의무, 그리고 종족 간의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지금, 한 인간이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누군가 오고 있어!”

엘리시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날카로운 경계심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이곳은… 우리 종족에게조차 함부로 접근이 금지된 곳이다. 너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라. 내가 처리하겠다.”

“저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왕녀님.”

강현은 그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엘리시아는 그의 말에 순간 당황했다. 그래, 약속했다. 이 인간을 죽이지 않겠다고.

“어리석은… 인간. 네놈의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

“당신이 위험하다면, 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죠.”

강현의 말에 엘리시아는 충격받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왜 자신을? 자신은 인간의 적이자, 어둠의 권속인데?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횃불 불빛이 흔들리며 다가왔다.

“어서 숨어! 이대로라면 너도… 위험하다!”

엘리시아는 다급하게 속삭이며 강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손길은 차가웠지만, 강현은 그 안에서 묘한 온기를 느꼈다. 그들 사이의 금지된 장벽이, 아주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그들의 만남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이내, 어둠 실 잣는 자 특유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들이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이곳에… 엘리시아 왕녀님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 불경한 의식을 방해한 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강현과 엘리시아는 숨을 죽였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심장이, 금지된 연대의 시작을 알리며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