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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잿더미의 경고 (Warning from the Bloody Ashes)**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벙커 안, 눅눅한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낡은 철제 파이프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촛불이 일렁이는 벽면에는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탁자 위에는 손때 묻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찢어지고 구멍 난 지도 위로 붉은색과 검은색 펜으로 표시된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제국의 진격로, 반란군의 거점, 그리고 감염자들의 이동 경로. 이 모든 것이 한 장의 종이 위에 혼돈처럼 그려져 있었다.
강림은 지도를 뚫어지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촛불처럼 흔들림 없이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 담긴 피로와 고뇌는 감출 수 없었다. 며칠 밤낮으로 잠을 설쳤는지, 그의 턱에는 거뭇한 수염이 거칠게 자라 있었고, 핏줄이 선 눈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충혈되어 있었다.
“세라, 아직 소식이 없어?” 강림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 수도 외곽의 정찰을 나간 세라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약속된 시간 안에 돌아오는, 믿음직스러운 정찰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긴 지 오래였다.
바로 그때였다. 철컥, 육중한 철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먼지바람과 함께 뛰어들어온 건 세라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땀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낡은 가죽 재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한쪽 팔에는 깊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세라! 괜찮아?” 강림이 성큼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다른 대원들도 일제히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라는 강림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지,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녀는 거친 숨을 고르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제국군입니다. 제1군단 소속 선봉대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강림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선봉대라고? 정확히 몇 기갑병력이었지? 위치는?”
“숫자는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상당했어요. 그리고 일반 병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수도 방위군 소속의 특수 부대였습니다. 제국 황제의 직속 친위대라고 불리는… ‘그림자 기사단’의 휘장을 봤습니다.” 세라의 목소리에 일말의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 그들은 제국 내에서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한 부대로 악명 높았다. 그들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이번 작전이 제국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반증하는 것이었다.
“젠장.” 수혁이 짧게 욕설을 뱉었다. 수혁은 숱한 전투를 함께 해온 강림의 오른팔이자, 반란군의 최고 참모였다. 그의 표정 또한 굳어 있었다. “그럼 수도의 주력 병력이 움직였다는 거군. 설마… 우리가 감히 수도를 노릴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겨우 숨을 돌렸다. “놈들이… 감염자들을 몰고 있습니다.”
순간, 벙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감염자들을 몰고 다닌다니. 제국이 자주 쓰는 전술이었다. 감염자들을 선봉에 세워 적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그 뒤를 따라 주력 부대가 진격하는 방식.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방식이었지만, 그만큼 효과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젠장, 정말 미친 놈들 같으니.” 젊은 여자 대원, 지윤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지윤은 제국의 만행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뒤 반란군에 합류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럼 우리가 있는 곳까지 감염자들을 몰아넣겠다는 거잖아! 도시에 사는 민간인들은 어떻게 되라고!”
강림은 지도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제국군 선봉대의 진격 예상 경로, 그리고 그들이 몰아올 감염자 떼. 이대로 가면, 자신들이 세운 방어선은 물론이고, 아직 미처 피하지 못한 수도 외곽의 민간인 거주지까지 모조리 휩쓸릴 터였다.
수혁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강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 일단 후퇴해야 해. 지금 병력으로 그림자 기사단과 감염자 떼를 동시에 막아내는 건 불가능해. 우리가 살아남아야 다음에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후퇴라고?” 지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럼 저 도시 사람들은요? 제국이 감염자들을 몰고 오면… 다 죽는 겁니다!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 병력을 다 희생할 수는 없어, 지윤!” 수혁의 목소리에도 초조함이 묻어났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이야. 지금 우리가 무너지면, 제국에 맞설 힘은 완전히 사라진다고!”
벙커 안에는 격렬한 논쟁이 오고 갔다. 후퇴와 항전,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대원들은 갈등했다. 강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눈앞에는 과거 제국군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마을의 모습, 그리고 감염자들의 울부짖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대로 후퇴하면, 그 모든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
강림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피로가 아닌, 강렬한 결단이 서려 있었다. “후퇴는 없다.”
모든 대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세라의 보고가 맞다면, 제국은 우리가 수도를 직접 노릴 만큼 성장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주력 부대까지 움직인 거겠지.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틀렸어.” 강림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우리가 직접 수도를 공격하는 건 아직 무리다. 하지만… 제국이 수도 방위군까지 끌어들여 외곽 방어선을 비워뒀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들의 심장부를 노릴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해.”
“강림, 설마…?” 수혁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강림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수도를 노리지 않는다. 그럴 여력도 없다. 하지만… 제국군 선봉대가 이곳으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보급로가 있다. 바로 제3 보급창이다.”
지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3 보급창이요? 그곳은 수도에서 가장 큰 보급 기지 아닙니까? 경계가 삼엄해서 근처에도 못 가는 곳인데요!”
“경계가 삼엄한 만큼, 제국군은 이곳에만 신경 쓸 거야. 수도 방위군까지 움직인 지금, 그들의 후방은 생각보다 허술할 수도 있다.” 강림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 “감염자들을 앞세워 우리를 몰아붙이는 동안, 그들의 보급선은 방심할 거다. 그때를 노리는 거야.”
“잠깐, 강림! 그건 너무 위험해!” 수혁이 말했다. “제3 보급창은 단순히 보급 기지가 아니야. 그곳엔 제국의 대규모 감염자 실험 시설이 있다는 소문도 있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질 수도 있다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안전한 길은 없어. 이대로 후퇴하면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을 거고, 이곳을 지켜내려다간 우리가 죽을 거야.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면… 우리는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해.” 강림은 대원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다. “제3 보급창을 타격한다면, 제국군의 전진 속도를 늦출 수 있고, 감염자들을 몰아넣으려는 그들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거야. 게다가… 운이 좋으면, 우리가 절실히 필요한 물자를 확보할 수도 있다.”
세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보급창 내부에 대한 정보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강림은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세라, 네가 정찰 팀을 이끌어. 수혁, 넌 대원들을 정비하고 기습 작전을 준비해. 지윤, 넌 저격 팀을 맡아 보급창 외부 경계를 담당한다.”
모든 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과 비장함이 교차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 속에는 한 가지 공통된 감정이 있었다. 바로 제국에 대한 분노,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이번 작전은… 성공해야만 한다.” 강림은 탁자 위에 놓인 지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의 주먹 아래, 낡은 지도는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그때, 멀리서 희미한 폭음 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벙커 안의 촛불이 크게 일렁였다.
세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감염자들입니다… 생각보다 더 빠르게 진격하고 있어요. 제국군이 우리를 얕보지 않았습니다!”
강림은 차분하게 말했다. “예상보다 빠르다고 해서 우리의 계획이 바뀌는 건 없어. 오히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다는 뜻이지. 지금 당장 움직인다!”
철컥. 강림은 허리에 찬 낡은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핏빛 잿더미 위에서, 그들의 반란은 이제 거대한 폭풍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 제국의 심장에 비수를 꽂기 위한 결단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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