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4화. 침묵의 그림자
숨 막히는 정적이 폐허가 된 쇼핑몰을 짓누르고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낮인지 밤인지 가늠하기 힘든 어스름한 빛이 내부를 어지럽게 비췄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썩은 내음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강준은 손에 든 개머리판 없는 소총을 고쳐 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낡은 운동화 밑창이 깨진 유리 조각을 밟을 때마다 신경을 긁는 소리가 났다.
“강준 씨, 저기요.”
뒤따르던 지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한 손에는 날이 무뎌진 식칼을, 다른 손으로는 등에 멘 배낭의 어깨끈을 잡고 있었다. 지아가 가리킨 곳은 한때 번화했을 옷가게의 마네킹이었다. 목이 잘려나간 마네킹은 기괴하게 기울어진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이젠 이런 광경쯤은 익숙하다 못해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민수, 주변 살피고.”
강준의 말에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낮춰 옆쪽 상점으로 빠르게 진입했다. 민수는 체격은 왜소했지만, 움직임만큼은 날다람쥐 같았다. 그의 눈은 예리하게 주변을 훑었다. 유리창이 깨진 진열대, 바닥에 나뒹구는 상품들, 그리고 어둠 속에 숨겨진 모든 그림자들까지.
“너무 깊이 들어온 거 아니에요? 바깥쪽만 훑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아가 불안한 듯 물었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저번에 찾던 그거, 재고가 제일 많았던 곳이 여기 약국이었어. 설마 했는데, 역시나 다 털렸더라고.” 강준이 낮게 읊조렸다. 그들이 찾는 건 비상 상비약이었다. 최근 캠프에서 어린아이들이 고열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항생제가 절실했다.
그들이 목적했던 약국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약병들은 바닥에 깨진 채 뒹굴었고, 약장 서랍은 모조리 열려 약봉지 잔해와 함께 흩어져 있었다. 희망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젠장.” 강준이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그의 눈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없네… 역시 이런 큰 곳은 우리 같은 애들이 올 때까지 남아있을 리가 없죠.” 지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척… 척…’ 금속이 녹슨 바닥에 끌리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강준과 지아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약국 안쪽 깊숙한 곳, 직원 전용 통로로 보이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민수!” 강준이 불렀지만, 민수의 대답은 없었다. 민수는 이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숨긴 채 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개조된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
“뭐 보여?” 강준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민수는 손짓으로 ‘조용히’라는 신호를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망원경을 통해 본 시야는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식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긁히는 소리뿐만 아니라, 무언가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둔탁한 소리까지 섞여 들려왔다.
“저건… 감염자 소리가 아니야.” 지아가 속삭였다. 감염자들은 대부분 불규칙적인 신음 소리나 비명, 혹은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저 소리는 어떤 도구를 끌고 가는 듯한, 규칙적이고 기분 나쁜 소리였다.
강준은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현명했다. 하지만 약을 구하지 못하면 캠프의 아이들이 위험했다. 이곳까지 온 이상,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결의에 차 있었다.
“민수, 먼저 가서 확인해.” 강준이 지시했다.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여 통로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민수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민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소리가 뚝 끊겼다. 이어 ‘철컥’하는 작은 금속 소리가 들렸다.
“젠장, 대체 뭐야?” 지아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강준은 소총을 바싹 끌어당기며 통로 입구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는 손전등을 꺼내 불빛을 조절했다. 만약 감염자라면, 불빛은 어그로를 끄는 행위였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불빛은 경고가 될 수도 있었다.
“민수? 괜찮아?” 강준이 나지막이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강준은 눈빛으로 지아에게 뒤를 지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지아는 식칼을 꽉 움켜쥐었다.
강준이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통로 끝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있었다. 민수가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민수야, 거기 뭐 있어?” 강준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섞였다.
민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에 들린 망원경은 이미 내려져 있었고, 그의 시선은 철문을 향해 있었다.
“강준 씨… 이거…” 민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준은 민수에게 다가가 철문을 응시했다. 철문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누군가 고의적으로 용접을 해 막아놓은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강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 아래, 문에 걸려 있는 낡은 철사였다. 철사 끝에는 작은 종이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강준은 조심스럽게 쪽지를 떼어냈다. 흙먼지로 뒤덮인 쪽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들어오지 마시오.
들어가면…
후회할 것이다.’
쪽지의 글귀를 읽는 순간, 강준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건 감염자들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이건… 인간이 남긴 경고였다.
“뭐라고 써 있어요?” 지아가 어느새 다가와 물었다.
강준은 쪽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철문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희미했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다른 생존자들인가?” 지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니… 이건…” 강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들의 움직임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혹은 무언가를 경계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림자들 사이로 언뜻 스쳐 지나간 것은, 피로 물든 듯한 붉은 흔적이었다.
그때, 철문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섬뜩한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젠장, 돌아가자!” 강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는 민수와 지아의 팔을 잡아끌며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민수와 지아는 강준의 다급함에 영문도 모른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소리와 섬뜩한 웃음소리는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했다.
그들이 쇼핑몰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바깥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몸을 으슬으슬하게 만들었다. 겨우 숨을 고른 강준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쪽지를 다시 꺼냈다.
“후회할 것이다라…” 강준은 쪽지를 찢어버렸다.
“강준 씨, 대체 뭐가 있었던 거예요? 그 안에요?”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좋은 건 아니었어.” 강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곳은 우리가 갈 곳이 아니야. 분명 뭔가 숨기고 있어. 아니면… 이미 뭔가에 잠식당했거나.”
그들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폐허의 도시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그들은 오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항생제도, 식량도. 다만, 알 수 없는 공포와 불길한 경고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우리… 어디로 가야 하죠?” 민수가 작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한 희망조차 잃은 듯했다.
강준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멀리 떨어진 빌딩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들의 캠프였다.
“일단, 돌아가야 해. 그리고… 다시 방법을 찾아야지.” 강준은 힘겹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만이 가득했다. 철문 뒤에 숨어 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경고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둠은 그들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는, 감염자들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