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톱니바퀴 아래, 잿빛 숨결
철컥, 쉬이이익—.
아침을 알리는 소리는 동이 트는 햇살이나 새들의 지저귐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 강철 도시 ‘벨룸’의 하층 구역에선 언제나 증기 기관이 토해내는 육중한 금속음과 역한 석탄 연기가 지배적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낡고 녹슨 건물들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서로를 맞물려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솟아오른 굴뚝들은 끊임없이 잿빛 숨결을 내뿜으며 하층민들의 폐부를 갉아먹었다.
지우는 익숙한 냄새 속에서 눈을 떴다. 눅눅한 기름때와 희미한 빵 냄새, 그리고 늘 콧속을 자극하는 매캐한 연기. 좁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초라한 단칸방에 울렸다. 그의 작업실을 겸한 이 방은 부서진 기계 부품들과 뜯겨 나간 회로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한쪽 벽에는 고장 난 증기 압력계가, 다른 쪽에는 녹슨 렌치와 드라이버가 매달려 있었다. 지우에게 이 모든 고물들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서 그는 생명을 불어넣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젠장, 또 전력 제한인가.”
벽에 걸린 낡은 전등이 깜빡거리다 이내 꺼졌다. 상층부의 권력자들은 언제나 하층민들의 전력 사용량을 마음대로 조절했다. 상층 구역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위해, 하층민들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지우는 익숙한 듯 한숨을 쉬며 작업대 위에 놓인 소형 기름등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흙먼지와 기름때로 얼룩진 작업복 아래로 다부진 몸과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스무 살 남짓한 그의 얼굴에는 이미 고된 삶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움직이는 기계 부품들을 볼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쳤다.
오늘도 폐기물 처리장에서 쓸 만한 부품을 찾아 나서야 했다. 제국은 날마다 막대한 양의 폐기물을 쏟아냈지만, 그 중 하층민에게 허락된 것은 썩어가는 잔해와 쓸모없는 찌꺼기뿐이었다. 그러나 지우는 그 속에서 고장 난 증기 밸브를 분해하여 새것처럼 수리하고, 멈춰버린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아 생명을 부여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땜쟁이 지우’로 불리며 작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지우! 안에 있니?”
문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길 건너 빵집을 하는 릴리 아줌마였다.
“네, 아줌마!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릴리 아줌마의 푸근한 인상이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갓 구운 듯 따뜻한 빵 몇 조각이 들려 있었다.
“이 지지배가 아침도 안 먹고 일만 하려고 그러네. 얼른 먹어. 오늘 새로 나온 빵이야.”
“아줌마, 매번 이렇게 신세를….”
“신세는 무슨! 네가 고쳐준 저울 덕분에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 줄 알아? 됐고, 얼른 먹고 기운 차려.”
릴리 아줌마는 지우의 작업대를 흘긋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요즘 순찰대들이 더 설치네. 어제는 시장 골목에서 영감님 한 분이 제국법 위반이라고 잡혀갔어. 낡은 증기 라디오 고쳐 쓰려다가…”
“또요?” 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이제 자기네들이 생산한 부품 아니면 고쳐 쓰는 것도 불법이래. 상층부 놈들은 우리더러 매달 신형 부품을 사 쓰라는 건데, 우리가 무슨 돈이 있다고.”
릴리 아줌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제국은 하층민들의 자급자족마저 막으며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새로운 기계 부품은 상층부에서만 생산되었고, 그 가격은 하층민들에게는 사실상 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영감님은 어떻게 됐어요?” 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끌려갔지, 뭐. 노동 수용소로 갔을 거야. 뼈 빠지게 일하다 죽는 것 말고는….”
릴리 아줌마의 말끝이 흐려졌다. 지우는 묵묵히 빵을 베어 물었다. 퍽퍽한 빵이었지만, 릴리 아줌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어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차가운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오늘은 폐기물 처리장 대신 시장 골목으로 좀 나가봐야겠어요.” 지우가 말했다.
“왜? 위험할 텐데.”
“부품 좀 구할 것도 있고요. 혹시 영감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릴리 아줌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봤다. “조심해라, 지우. 요즘 ‘강철 방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 괜히 나섰다가 너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강철 방패’는 제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계화된 순찰대였다. 인간 병사와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화 기계들이 혼합된 무시무시한 존재들. 그들은 제국법을 위반한 자들을 가차 없이 진압하고 끌고 갔다. 하층민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낡은 가죽 가방을 둘러멨다. 그 안에는 그가 직접 만든 공구들이 가득했다. 폐기물 처리장을 가려던 계획을 바꿔 시장 골목으로 향한다. 어쩌면 영감님이 잡혀갈 때 떨어뜨린 작은 부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희망보다는 분노가 더 큰 이유였지만.
시장은 여느 때처럼 활기 넘쳤지만, 그 활기 속에는 짙은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허름한 노점상들은 제국의 눈을 피해 몰래 암거래를 하거나, 낡은 부품들을 서로 교환했다. 지우는 익숙한 듯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영감님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어제 끌려간 김 노인 말이야, 그게 다 ‘밤 그림자’들 때문이라던데?”
“쉿! 조용히 해! 듣는 사람 있어!”
“밤 그림자? 그게 뭔데?”
“모르긴 뭘 몰라. 제국에 맞서 싸운다는 그림자 같은 놈들 말이야. 김 노인이 그놈들한테 부품을 대줬다는 소문이 돌더라.”
지우의 귀가 쫑긋 섰다. ‘밤 그림자’. 최근 하층 구역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제국의 폭압에 맞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저항 세력.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쥐새끼처럼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듣는 이들은 두려움 반, 희망 반의 눈빛으로 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게 사실이야?” 지우가 옆에 앉은 노점상에게 조용히 물었다.
노점상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알겠나. 하지만 어제 김 노인이 잡혀갈 때, 누군가 일부러 경비대 시선을 끌어서 도망치게 하려던 걸 봤다는 사람도 있어.”
“그게 밤 그림자들이라는 건가요?”
“글쎄다. 섣불리 입에 올릴 이름은 아니지. 하지만…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아졌어. 제국이 조용히 넘어가려던 일들도 꼭 터뜨리는 놈들이 있다더군.”
그때, 저 멀리서 둔탁한 발소리와 함께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철 방패다! 흩어져!”
누군가의 외침에 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고, 노점상들은 급히 물건들을 숨기기 시작했다. 지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세 대의 거대한 증기 구동 자동화 병사들이 시장 골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철제 팔에는 섬뜩한 광선을 뿜어내는 총기가 장착되어 있었고, 육중한 몸체는 땅을 울렸다. 그 뒤를 이어 제국 병사들이 들이닥쳐 달아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붙잡았다.
“불법 물품 압수! 저항하는 자는 즉시 체포한다!”
병사들의 고함이 시장에 울려 퍼졌다. 지우는 숨을 죽인 채 몸을 웅크렸다. 그의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김 노인이었다. 팔이 뒤로 묶인 채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김 노인을 끌고 가던 병사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그의 발목에 작은 철제 공이 부딪힌 것이다. 누가 던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김 노인은 병사들의 손에서 벗어나 옆 골목으로 비틀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자동화 병사 중 하나가 김 노인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쾅! 거대한 금속 주먹이 김 노인의 몸에 정통으로 박혔다. 그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젠장…!”
지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앞에서 무고한 노인이 폭력에 희생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고작 ‘밤 그림자’와 연루되었다는,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 때문에.
병사들은 쓰러진 김 노인을 확인도 하지 않고 다시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지우는 숨어 있던 곳에서 겨우 빠져나와 몸을 피했다.
골목을 벗어나려던 지우의 발끝에 무언가 걸렸다. 작은 철제 핀이었다. 주워보니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의 핀이었다. 평범한 장식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 같은 정교한 세공이었다.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작은 톱니바퀴에서부터.*
지우는 핀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방금 들었던 ‘밤 그림자’에 대한 소문,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김 노인의 참혹한 죽음이 뒤섞여 그의 마음속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톱니바퀴 아래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이제는 뭔가 해야 할 때였다. 이 작은 톱니바퀴가 거대한 증기 기관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지우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잿빛 도시의 연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지우는 고개를 들어 굴뚝 연기로 가려진 상층 구역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철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에서는 번쩍이는 황금빛 불꽃이 하층민들의 어둠을 조롱하듯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지우는 결심했다.
어쩌면… 이 핀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지도 몰랐다. 그는 핀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제는, 부딪혀야 할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