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황무지의 바람은 언제나 그랬듯 비릿한 먼지 냄새와 함께 살을 에는 듯했다. 낡고 찢어진 천 조각들이 휘날리는 방호복 안으로 스며드는 한기에 이준은 몸을 웅크렸다. 지평선 너머로 붉게 저무는 태양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 대재앙 이전의 푸른 하늘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거대한 불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준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지겹도록, 그래서 때로는 고독하게 느껴지는 풍경.

“이준 오빠, 좌표 거의 다 왔어요.”

낡은 통신 장비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김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언제나 활기찼지만, 목소리 끝에 스치는 피로감은 숨길 수 없었다. 이준은 등 뒤에 멘 낡은 소총의 개머리판을 고쳐 잡았다. 수십 년 전의 유물인 이 총은 그 어떤 최신 무기보다 믿음직했다. 아니, 이 황무지에서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손에 쥔 것과 옆을 지키는 동료뿐이었다.

“너무 깊이 들어온 것 같긴 한데.” 이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히 자원 탐사가 아니었다. 잿빛 황무지 북부, 과거 ‘잃어버린 도시’라고 불리던 곳의 지하에 잠들어 있다는 고대 유적의 단서를 찾는 것. 새벽 마을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수백 년 전, 대재앙이 모든 것을 뒤엎었을 때, 인류의 문명은 땅속으로 사라지거나 폐허로 변했다. 이곳 북부 황무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그 시절의 ‘초고대 문명’이 마지막까지 지켜내려 했던 거대한 지하 유적이 있다고 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인류를 멸망으로 이끈 진실, 혹은 새로운 시작의 열쇠.

삐빅, 삐빅. 통신 장비의 신호가 급격히 강해졌다. “오빠, 바로 여기예요! 신호가 미친 듯이 뛰고 있어요!” 아라의 목소리에 흥분감이 묻어났다.

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검붉은 바위 절벽이었다. 오랜 침식으로 깎여나간 듯한 형태는 자연이 빚어낸 걸작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기묘한 아름다움 속에서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피어올랐다.

“이거… 자연 지형 같진 않은데.” 이준이 손전등을 들어 절벽을 비췄다. 희미한 불빛 아래, 바위 틈새에서 녹슨 금속 구조물의 흔적이 드러났다. 거대한 암반이 마치 거대한 문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이게 전설 속의…?” 아라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믿기지 않아요. 이런 곳에 거대한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니!”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서자, 오래된 콘크리트와 금속이 뒤섞인 인공적인 통로가 나타났다. 완벽하게 위장되어 외부에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구조였다. 수십 미터 아래로 이어지는 통로는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있었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묵은 먼지가 코를 찔렀다.

“조심해, 아라. 이런 곳일수록 예상치 못한 함정이 있을 수 있어.” 이준은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발밑의 자갈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깊은 심연 속으로 메아리쳤다.

통로를 따라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천천히 발을 옮기며 이준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낡은 벽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상형문자와 같은 형상들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언어인지, 아니면 단순한 낙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 어떤 문양에서도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준 오빠, 저것 좀 봐요!” 아라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벽면에서 돌출된 낡은 금속판이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중앙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삼각형이 겹쳐진 듯한 복잡한 형태였다. 새벽 마을의 낡은 기록에서 본 적이 있는 문양이었다. ‘옛 시대의 수호자들’이라 불리던 집단의 상징.

“이게 여기 있을 줄이야…” 이준은 손가락으로 문양을 쓸어봤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쿵, 하고 울렸다. 거대한 진동이 땅바닥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굵은 먼지 덩어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지진인가요?!” 아라가 외쳤다.

“아니, 뭔가… 움직이고 있어!” 이준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유적 자체가 깨어나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

진동은 이내 잦아들었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소리가 남았다. 쇠와 쇠가 갈리는 듯한 끔찍한 마찰음이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준의 눈앞에서, 아까 보았던 고대 문양이 새겨진 금속판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꾸르르륵…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금속판 뒤의 벽이 통째로 옆으로 움직였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투박한 통로와는 전혀 다른, 정교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통로 저편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아라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통로 저편은 마치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 같았다. 하지만 이준은 그 빛에서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오랜 시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난 듯한, 혹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만한 거대한 무언가가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직감.

“들어가자.” 이준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새벽 마을의 희망이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희망을 영원히 꺼뜨릴 절망이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자, 차가운 금속성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빛은 더욱 강해졌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는 저편의 광경이 흐릿하게나마 비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홀. 그리고 그 중앙에 서 있는,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검은 실루엣.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은 분명했다.

“이준 오빠, 저… 저건…” 아라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떨렸다.

이준은 소총을 겨누고 빛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눈에, 희미한 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거대한 기계 장치와, 그 장치에 매달린 수많은 케이블,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형체가 들어왔다.

고대 유적의 비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상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위험한 존재를 마주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