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콘크리트 빌딩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 도심 한복판. 15층 높이,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 꼭대기에 자리한 김기태 박사의 서재에서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천재적인 두뇌와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한 은둔의 발명가, 김 박사가 자신의 책상에 엎드린 채 칼에 찔려 사망한 것이다.
최형사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쓸어 올렸다. “말도 안 돼… 이건 불가능하다고.”
서재는 완벽한 밀실이었다. 육중한 강철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열쇠는 김 박사의 차가운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거대한 통유리창은 안쪽에서 걸쇠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고, 창밖은 15층 높이의 허공뿐이었다. 침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경찰은 모든 가설을 동원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자살? 하지만 등 뒤의 상처는 명백한 타살을 가리켰다.
그때, 검은색 세단이 조용히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여인은 주변의 소란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서은유. 그녀의 등장은 늘 그랬듯이 사건 현장의 혼돈을 잠재우는 듯했다. 천재 탐정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녀의 수사 방식은 종종 예측 불가능하고 기묘했다.
“서 탐정님 오셨습니까.” 최형사가 반갑다는 듯 다가섰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서재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은유는 묵묵히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피 냄새와 먼지, 그리고 섬뜩한 침묵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김 박사의 시신, 정확히는 그의 손에 쥐어진 낡은 열쇠로 향했다. 금속으로 된 그 열쇠는 얼핏 보면 평범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뭔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피해자가 문을 잠근 뒤 사망했다면,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요?” 은유가 읊조리듯 말했다. “아니면, 범인이 문을 잠갔다면, 이 열쇠는 왜 피해자의 손에 쥐어져 있을까요?”
최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입니다.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열쇠를 쥐여줬다기엔, 등 뒤의 상처가 너무 명백하고… 그렇다고 박사님이 스스로 잠그고 죽을 이유도 없고요.”
은유는 허리를 굽혀 김 박사의 손에서 열쇠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낡고 투박한 감촉,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문양. 그녀는 열쇠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이 열쇠는 단순한 열쇠가 아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녀의 머릿속을 감쌌다. 꽉 막힌 벽, 부서지지 않는 밀실. 그 불가능함의 한가운데서, 그녀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마치 어떤 주파수에 맞춰지듯,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시간의 흐름이 일그러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
눈을 떴을 때, 은유는 자신이 다른 공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김 박사의 서재였지만, 모든 것이 생생하고 살아 움직였다. 먼지 없는 공기, 희미한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정돈된 서류들이 놓여 있었고, 피 한 방울도 없었다. 그리고… 김 박사가 살아 있었다.
“어이, 민준 군! 내가 발명한 이 완벽한 보안 시스템을 보여주겠네!” 김 박사가 건너편에 서 있는 젊은 남자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김 박사는 자랑스럽게 서재 문을 닫았다. “자네, 문이 잠겼는지 확인해 보게나!”
민준이 문고리를 잡아 흔들자, 굳게 잠긴 육중한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흡족한 듯 낄낄거렸다.
“안에서 잠그는 건 식은 죽 먹기지. 이렇게.”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잠금장치를 돌렸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이중으로 잠겼다. 그리고 그는 열쇠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하지만 진짜 기술은 여기서부터라네!” 김 박사는 얇고 매끄러운 금속 카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신용카드와 비슷해 보였지만, 가장자리에는 복잡한 홈과 능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문밖으로 나가더니, 문틀과 문 사이에 있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아주 미세한 틈새에 그 카드를 밀어 넣었다.
민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은유 또한 숨을 죽였다.
김 박사가 카드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서재 안쪽의 굳게 잠겨 있던 데드볼트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풀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가! 완벽하지 않은가! 이건 내가 개발한 ‘자기장 우회 키’라네. 외부에선 그저 얇은 금속 조각처럼 보이지만, 특정 자기장 패턴을 읽어 내부 잠금장치를 조작할 수 있지. 오직 나만이 이 기술을 알고, 이 카드는 항상 내 손에 있다네!” 김 박사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 웃었다.
그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도 마찬가지라네! 15층이라 탈출은 불가능하겠지만, 만약을 위해 이중 잠금장치를 달아두었지. 게다가, 외부에서 이 볼트를 조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이 특수 제작된 와이어 루프 도구만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말이지!”
김 박사는 길고 가느다란 와이어 도구를 꺼내 보였다. 그리고 창문으로 다가가 볼트를 채우는 시늉을 하더니, 다시 밖으로 나가 와이어 도구로 외부에서 볼트를 푸는 시늉을 하는 기이한 시연을 이어갔다. 마치 창틀에 아주 작은 레버 같은 것이 있어 와이어로 당겨 볼트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그의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민준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갑자기 책상 위에 있던 편지칼을 쥐고 김 박사에게 달려들었다. “박사님! 제 인생을 망치지 마세요!”
날카로운 칼날이 김 박사의 등 뒤를 찔렀다. 김 박사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그는 쓰러지는 순간, 책상 위에 있던 열쇠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마치 최후의 방어 수단인 양, 아니면 범인을 가두려는 듯이.
민준은 김 박사의 몸을 밀치고, 그의 주머니를 뒤져 그 ‘자기장 우회 키’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문밖으로 나섰다. 밖에서 김 박사가 보여줬던 방식 그대로, 얇은 카드를 틈새에 밀어 넣어 문을 ‘잠갔다’. 서재 안쪽에서 데드볼트가 ‘철컥’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완벽하게 안에서 잠긴 밀실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창문으로 다가가 김 박사가 보여주었던 와이어 도구로 외부에서 창문의 볼트까지 채웠다. 그리고는 두 개의 도구를 든 채 황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
“하아… 하아…”
은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손에 쥐어진 열쇠는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다. 눈앞에는 최형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서 탐정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파랗습니다.”
은유는 손에 쥔 열쇠를 최형사에게 내밀었다. “최형사님. 이 열쇠는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최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열쇠를 바라봤다. “예? 하지만 피해자 손에 쥐여져 있었는데요?”
“피해자는 죽어가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이 열쇠를 잡은 겁니다. 아마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려 했거나, 혹은 범인을 가두려 했던 시도였겠죠.” 은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범인은 김 박사의 서재 문을 밖에서 잠갔습니다. 정확히는 ‘잠긴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최형사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밖에서요? 어떻게?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는데요!”
은유는 김 박사의 서재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틀과 문 사이의 아주 미세한 틈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 박사는 천재적인 발명가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죠. 그는 ‘자기장 우회 키’라는 것을 발명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카드에 불과하지만, 이 틈새에 밀어 넣어 내부의 잠금장치를 조작할 수 있었습니다.”
최형사는 경악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범인은 김 박사에게서 그 ‘자기장 우회 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심지어 그 카드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김 박사를 살해한 뒤, 그 키로 밖에서 문을 잠갔고, 다시 키를 회수해 사라졌습니다. 창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김 박사는 창문의 볼트를 밖에서 조작할 수 있는 특수 와이어 도구를 가지고 있었고, 범인은 그 도구를 이용해 창문까지 걸쇠로 잠갔습니다.”
“그럼 범인은 누구입니까?” 최형사의 목소리가 상기되었다.
“김 박사의 비서, 민준 군입니다. 그는 그 키와 도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김 박사의 보안 시스템 시연을 통해 범행 방법을 모두 파악했습니다. 아마 김 박사가 그의 연구를 빼앗으려 했거나, 다른 이유로 그를 압박했겠지요.”
최형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그럼 그 키와 와이어 도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버려졌을 겁니다. 현장을 벗어나면서 가장 쉽게 숨길 수 있는 곳에요. 예를 들면… 이 근처의 건설 현장 쓰레기장에요.” 은유는 창밖의 짓고 있는 고층 빌딩을 가리켰다.
최형사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민준이라는 사람을 추적해! 그리고 근처 건설 현장 쓰레기장을 샅샅이 뒤져!”
현장은 다시 분주해졌다. 은유는 차가운 서재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불가능했던 밀실은, 김 박사 자신의 오만함과 발명품에 대한 지나친 자랑 때문에 깨져버린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숨기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도 하는 법. 그녀의 ‘기묘한 직감’은 언제나처럼 진실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