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하고도 화려한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다. 27층, 거대한 콘크리트 숲의 한 조각인 내 아파트 창문 너머로 수백만 개의 불빛이 질서정연하게 깜빡였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빛나는 저 불빛들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때로는 이 거대한 도시 속 나 홀로의 존재감을 더욱 작게 만들기도 했다. 피곤한 하루의 끝, 지훈은 익숙하게 넥타이를 풀며 거실로 들어섰다.
탁, 탁.
불안하게 깜빡이는 거실 스탠드의 전구를 올려다봤다. 며칠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분명 새것으로 갈았는데도 가끔씩 제멋대로 명멸하며 기분 나쁜 침묵을 깨곤 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작게 중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스탠드를 툭 쳤다. 언제나 그랬듯 잠시 안정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깜빡거렸다. 지훈은 포기한 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이어폰을 끼고 최신 드라마를 보기 위해 태블릿을 들었을 때였다. 분명히 닫혀 있던 베란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 없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때문인가? 그러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층이라 외풍이 거의 없는 데다, 문을 잠그지 않으면 저절로 열릴 리 만무했다. 베란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고 살짝 흔들어보니, 분명히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틈새는 아까보다 더 벌어져 있었다. 누가 안에서 당기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문을 다시 꽉 닫고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착각이겠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식은땀이 등에 흘렀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는 어쩔 수 없었다. 주방으로 가 물 한 잔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떨리는 손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마시던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주방에서 나와 거실을 살폈다. 소파 앞, 어제 밤새 읽었던 책이 펼쳐진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던진 것처럼.
“이건… 아니잖아.”
그는 책을 주웠다. 딱딱한 양장본 책의 무게감이 손에서 느껴졌다. 이런 책이 저절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던 책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집 안의 모든 빛이 갑자기 희미해지는 듯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도시의 소음도, 이 순간만큼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민준? 너 지금 통화 가능해?”
[어, 지훈아.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왜 그래?]
“나 지금… 나 지금 좀 이상한 것 같아. 내 아파트에… 뭔가 있어.”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겪은 일들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민준은 처음엔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 아니냐며 웃어넘겼지만, 지훈의 진지하고 절박한 목소리에 점차 장난기가 사라지는 듯했다.
[야, 진정해. 설마 유령이라도 있다는 거야?]
“모르겠어. 그런데… 정말 이상해. 베란다 문이 저절로 열리고, 책이 떨어지고… 아까부터 계속 추워. 보일러도 잘 돌아가고 있는데.”
지훈은 팔을 쓸어 올렸다. 에어컨을 켠 것도 아닌데, 싸늘한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마치 한겨울 새벽에 창문을 열어둔 것처럼.
[으음… 요즘 그런 일들이 좀 많다고는 하더라. 너 혼자 사는 아파트인데… 괜히 기분 탓 아냐?]
“기분 탓일리 없어. 민준아, 나 진짜 무서워. 이젠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 뭐라고 웅얼거리는… 그런 소리.”
지훈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거실 한쪽 구석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낮고 불쾌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마치 모래알이 스치는 듯한,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야, 너 진짜 무서워하는 것 같네. 일단 진정하고… 내가 지금 갈까? 늦었는데…]
“아니, 아니야. 괜찮아. 그냥…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싶었어. 고마워, 민준아.”
지훈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전화를 끊었다. 민준이 온다고 해도, 이 기분 나쁜 현상이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거실을 비췄다. 불빛이 닿는 곳마다 그림자가 뒤척이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열쇠 꾸러미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지훈의 눈앞에서 열쇠 꾸러미는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집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도시의 밤을 밝히던 창문 너머의 불빛들마저 아득해졌다. 완벽한 어둠.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정적 속에서, 지훈은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겨우 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창문 유리창에 희미하게 습기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추운 날 입김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 습기 위로, 누군가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듯한 흔적이 나타났다. 느리고, 섬뜩하게.
**「가 지 마」**
지훈의 비명은, 어둠 속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