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회색빛 하늘 아래, 서아는 낡은 판잣집 지붕 위를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매캐한 연기 냄새와 썩은 음식물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저 멀리, 제국의 흉벽 너머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화려한 불빛이 밤을 밝혔다. 그곳은 ‘풍요의 구역’이라 불렸다. 우리 같은 ‘폐허 구역’의 주민들은 그저 저 빛의 잔해라도 먹고 살아가야 했다.
서아는 허름한 망원경을 눈에 대고 풍요의 구역을 응시했다. 거대한 첨탑 건물들은 밤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고, 반짝이는 비행체들이 그 사이를 유유히 오갔다. 이곳 폐허 구역에선 한 조각의 빵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저들은 넘쳐나는 식량과 전력으로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그리고 그 모든 풍요는, 우리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젠장.” 서아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아래쪽에서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아는 반사적으로 망원경을 내리고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그러나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소리. ‘병자’들의 발소리였다.
폐허 구역의 외곽은 부서진 건물들과 버려진 차들로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제국은 높은 장벽과 경비병들을 풍요의 구역 주변에만 배치할 뿐, 폐허 구역의 방어에는 단 한 명의 병사도 보내지 않았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
서아는 지붕에서 뛰어내려 좁은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병자들의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처음엔 단순한 전염병이라고 했다. 제국은 ‘안전하다’, ‘통제 가능하다’고 외쳤지만, 병자들은 통제되지 않은 채 우리들의 삶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갈고리 같은 손, 그리고 먹이를 찾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은 이곳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서아!”
골목 저편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현수였다. 덩치 큰 몸으로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병자 세 마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은 지민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물러서, 현수!” 서아가 외치며 달려갔다. 낡은 식칼을 뽑아 든 그녀는 병자 한 마리의 목덜미를 정확히 찔렀다. 병자의 몸이 경련하더니 쓰러졌다. 현수는 남은 병자를 파이프로 후려쳤고, 병자는 벽에 부딪혀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젠장, 끝이 없어.” 현수가 땀을 닦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 주에만 벌써 다섯 명이나 병자가 되었어. 제국 놈들은 대체 뭘 하는 거야?”
지민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요. 그들은 벽 뒤에서 저희가 죽어가는 걸 보고 즐기고 있을 거예요.”
서아는 바닥에 쓰러진 병자들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들은 한때 우리의 이웃이었고,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움직이는 죽음일 뿐.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의 근원에는 제국의 무관심과 탐욕이 있었다.
그날 밤, 서아는 폐허 구역 가장자리에 있는 오래된 창고에 모인 사람들을 응시했다. 현수, 지민, 그리고 노인장이라 불리는 지혜로운 어르신까지. 모두 제국의 억압과 병자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이제 더는 못 참겠어.” 서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창고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심장을 울렸다. “제국은 우리를 버렸어. 그들은 우리가 병자들의 먹이가 되든, 굶어 죽든 신경 쓰지 않아.”
“그럼 어쩌자는 말이냐.” 노인장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저들의 거대한 군대에 어떻게 맞서겠다는 거냐.”
“우리에겐 우리가 있어요.” 서아의 눈에 강렬한 불꽃이 타올랐다. “우리는 이 폐허 구역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야. 병자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지. 제국 놈들은 저 높은 벽 뒤에서 안락하게 살았으니, 이런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현수가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뭘 하자는 건데?”
“우리는 저들의 식량 창고를 습격할 거야.” 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풍요의 구역과 폐허 구역 사이에는 물자를 주고받는 비밀 통로가 있어. 그걸 이용할 거야. 그리고 병자들이 우리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어.”
창고 안이 술렁였다. 병자들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미쳤어?” 지민이 경악하며 말했다. “병자들을 어떻게 통제해? 그들은 우리도 공격한다고!”
“통제하는 게 아니야.” 서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들을 ‘유인’할 거야. 그들의 먹이를 향한 본능을 이용하는 거지. 제국이 병자들을 막느라 정신없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을 거야.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줄 거야. 우리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것을.”
며칠 후, 새벽이 채 밝기도 전, 서아와 현수, 지민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폐허 구역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들은 낡은 가죽 갑옷을 입고, 제국군에게서 빼앗은 총기 몇 자루와 각자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풍요의 구역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식량 보급 창고였다.
서아는 망원경으로 제국의 경비를 살폈다. 예상대로, 높은 장벽 위에는 주기적으로 순찰하는 제국군 병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주로 풍요의 구역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폐허 구역에서 넘어오는 위협은 병자들이 전부라고 믿는 듯했다.
“계획대로.” 서아가 나직이 속삭였다. “지민, 현수, 먼저 움직여.”
지민은 작은 수레에 기름때 묻은 천 조각들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 천 조각들에는 얼마 전에 습격한 제국군 막사에서 훔쳐 온 고기와 내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역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이 냄새는 병자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지민은 수레를 끌고 폐허 구역과 풍요의 구역을 잇는 버려진 하수도 통로로 향했다. 그곳은 제국군이 낡았다는 이유로 신경 쓰지 않던 곳이었다. 현수는 그 뒤를 따르며, 혹시 모를 병자들의 기습에 대비했다.
하수도 통로 끝에 다다르자, 지민은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뜨렸다. 쾅! 하는 둔탁한 폭발음이 어둠을 갈랐다. 통로를 막고 있던 얇은 철문이 박살 났다. 동시에, 고기 냄새가 폭발음과 함께 주변의 병자들을 자극했다.
“온다!” 현수가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수십, 수백 마리의 병자들이 일그러진 얼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고기 냄새가 풍기는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지민은 침착하게 수레에 불을 붙여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불붙은 수레가 고기 냄새를 더욱 강렬하게 퍼뜨리며 풍요의 구역 쪽으로 굴러갔다.
병자들은 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레를 쫓아 통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땅을 흔들었다.
“이젠 우리 차례야.” 서아가 식칼을 고쳐 잡았다.
제국군 경비병들은 폭발음과 병자들의 소란에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들은 병자들이 하수도를 통해 풍요의 구역으로 밀려들어 오는 것을 막으려 필사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하지만 병자들의 숫자는 압도적이었다.
이 혼란을 틈타, 서아와 노인장을 포함한 반란군은 미리 파악해 둔 보급 창고 뒷문으로 접근했다. 노인장은 낡은 자물쇠를 능숙하게 따고 문을 열었다.
창고 안은 놀랍도록 정갈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식량 상자들, 신선한 야채, 심지어 고기와 과일도 가득했다. 폐허 구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풍요였다.
“이런 개자식들…!” 현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창고 안쪽에 숨어있던 제국군 병사 두 명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반란군의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비웃는 듯했다.
“이 쓰레기들이 감히 여기까지!” 병사 중 한 명이 총을 겨누었다.
서아는 망설임 없이 식칼을 던졌다. 날카로운 칼날이 병사의 어깨에 정확히 박혔다.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놓쳤다. 현수가 달려들어 남은 병사를 파이프로 가격했다. 병사는 쓰러져 기절했다.
“시간 없어!” 서아가 외쳤다. “움직여!”
반란군은 능숙하게 식량과 보급품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많이, 그러나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제국군의 지원 병력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자루에 식량들을 가득 채워 넣었다. 노인장은 의약품과 무기까지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아, 저들을 봐!” 지민이 창고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폐허 구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새것 같은 위생 키트와 정수 시설, 그리고 심지어 휴대용 발전기까지 쌓여 있었다. 제국이 자신들만을 위해 비축해둔,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들이었다.
서아는 망설였다. 이 모든 것을 가져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져가.” 서아가 이를 악물었다. “필요한 모든 걸 가져가. 이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야.”
그들이 창고를 빠져나올 때쯤, 제국군의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 퍼졌다. 병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제국의 분노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서둘러!” 현수가 외쳤다.
그들은 훔친 보급품을 메고 하수도를 통해 폐허 구역으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는 병자들의 소란과 제국군의 총격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안전한 곳에 도착하자, 모두는 메고 온 자루를 내려놓았다. 자루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풍요로운 식량과 물품들을 보며, 폐허 구역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글썽였다.
“성공했다!” 누군가 외쳤고,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서아는 숨을 고르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풍요의 구역은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빛이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서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의 자비에 기대지 않을 거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 나갈 거야.”
밤바람이 폐허 구역을 스쳐 지나갔다. 병자들의 울음소리, 제국의 사이렌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노래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오랫동안 침묵했던,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반란의 서곡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