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 정신 차려!”
날카롭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순간, 멍하니 벽에 붙은 거미줄을 감상하던 내 시야에 한예진 선배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오, 여신이시여. 거미줄 감상 같은 따위의 저급한 행위에 빠져있던 나 같은 필부에게 어찌 이리 눈부신 존재가…
“네? 아, 네! 선배!”
나도 모르게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선배의 갸우뚱하는 표정에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젠장, 또 병신 짓 했다!*
한예진 선배. 우리 학교 경영학과 3학년,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학교 최고의 인기인. 그리고 김민준, 경영학과 2학년, 존재감은 먼지만도 못한 모태솔로 아싸. 이런 우리가 왜 같이 이 낡아빠진,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학교 별관 지하 자료실에 박혀 있느냐고? 그건 다 빌어먹을 ‘근대 한국 사회의 미신적 현상 연구’ 조별 과제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 평화롭게 혼자 과제하다 학점만 잘 받는 게 목표였는데, 조원 랜덤 배정의 신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다.
“김민준, 너 혹시 나한테 불만 있어?”
선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심장이 발목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뇨! 절대요! 감히 제가 어떻게 선배님께! 그저 선배님의 미모에 압도되어 잠시… 황홀경에 빠져…”
“닥쳐.”
단호한 한마디에 내 변명은 칼같이 잘려나갔다. 선배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건 ‘개화기 경성 지역에 퍼졌던 미신 관련 기록’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몇 분째 벽에 붙은 거미줄이랑 책장 먼지랑 영혼의 대화를 나누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아무리 찾아도 그런 기록은 안 보이고… 이 오래된 책들 사이에 제가 원하는 로맨스 소설이 숨어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잠시…”
“하아… 됐어. 이쪽 책장 내가 볼 테니까, 너는 저 안쪽 구석에 있는 봉인된 책장 좀 봐. 아마도 옛날 사학과에서 쓰던 자료들일 거야. 먼지 장난 아닐 테니까 마스크 꼭 쓰고.”
선배는 투덜거리면서도 나에게 마스크를 건네주었다. *크으, 역시 우리 예진 선배… 츤데레 매력까지 완벽해…!* 혼자 감동하고 있는데 선배가 다시 째려봤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가봐.”
“네!”
나는 마스크를 황급히 쓰고, 선배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별관 지하 자료실의 가장 안쪽, 빛 한 점 제대로 닿지 않아 음침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낡은 나무 책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책장과 책장 사이의 좁은 통로에는 이름 모를 물건들이 마치 유물처럼 쌓여 있었다. 발자국 소리조차도 크게 울릴 만큼 고요했다.
“여긴 도대체 몇 년이나 사람이 안 들어왔던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 있거나, 알아보기 힘든 옛 한글로 쓰인 서적들이었다. 제목조차 해독하기 어려운 것들이 태반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우리가 찾는 자료가 나올까? 의심 반, 체념 반으로 손을 뻗어 한 권 한 권 책 등을 훑어 내려갔다.
그때였다.
손가락이 닿은 책장의 한 부분이 삐걱, 하고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어…?”
나는 움찔하며 손을 뗐다. 낡은 책장 안쪽에서 뭔가가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책장의 옆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른 책장들과는 다르게 나무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아주 희미한 선이 보였다. 마치 비밀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마. 설마 이게 진짜…!
어렸을 때 봤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선을 따라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쉽게 틈이 벌어지며, 낡은 나무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먼지 냄새, 그리고 묘하게 달콤하면서도 알 수 없는 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작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 한가운데, 낡은 나무 탁자 위에 놓인… 검은색 상자 하나.
상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가로 세로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정육면체 모양의 나무 상자였다. 표면은 닳아 해졌지만, 자세히 보면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 별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곡선들이 얽혀 있기도 했다. 마치 고대의 주술 문양 같았다.
“선배!”
나는 저도 모르게 선배를 불렀다.
“왜? 뭐 찾았어?”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선배의 모습이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나타났다. 선배는 내 뒤편으로 와서 열린 비밀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선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이런 곳이 있었어?”
선배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상자에 다가갔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지만, 선배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이거… 혹시… 유물 같은 건가?”
선배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화르륵!*
상자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갑자기 푸른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료실 전체의 전등이 깜빡이며 꺼졌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우리는 동시에 움찔했다.
“어? 정전인가?”
선배가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휴대폰 손전등을 켜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때, 푸른빛을 내던 상자가 갑자기 덜컥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네? 실망이다.”
선배가 김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상자 안쪽 바닥에 희미하게 그려진 문양… 그것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내가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려 몸을 기울이는 순간, 내 손이 미끄러지면서 상자 안으로 쑥 빠져버렸다.
“어어어?!”
찰나의 순간, 손바닥에 알 수 없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통증은 아니었지만, 마치 심장이 손바닥에서 뛰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동시에 상자 바닥의 문양이 폭발하듯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콰아아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자료실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고,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선배가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달라붙었다.
“김민준! 괜찮아?! 이게 무슨…!”
빛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휴대폰 손전등 빛을 비추자, 자료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책장, 흩어진 책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나와 선배.
“으… 으음…”
내 손바닥은 여전히 뜨거웠다. 나는 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런데…
“선배, 저… 저기요…!”
나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선배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민준아? 너 혹시 다쳤어?”
선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순간, 선배의 머리 위에… 분홍색 하트가 뿅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공중에 둥실 떠 있었다!
“선… 선배! 머리 위에… 하트가…!”
나는 손가락으로 선배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선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듯했다.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없는데?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선배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내 눈에는 보였다. 분홍색 하트가 선배의 정수리 위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마치 게임 캐릭터의 호감도 표시처럼!
그때, 내 손바닥에서 다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선배의 어깨를 잡았다.
“선배, 진짜예요! 제 눈에는 보여요! 뭔가…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내 손이 선배의 어깨에 닿는 순간, 선배 머리 위에 있던 분홍색 하트가 갑자기 크기를 키우더니 *팝!*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동시에 선배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지며, 선배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김민준… 너… 너 자꾸 그렇게 가깝게 다가오면… 내가… 내가 너 좋아서 미칠 것 같잖아!”
선배의 말에 나는 얼어붙었다. 텅 빈 자료실에 선배의 고백 같은 외침이 크게 울려 퍼졌다.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이건… 이건 내가 상상하던 로맨틱 코미디 전개와는 너무 다르잖아?!
내 손바닥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리고 그 뜨거움과 함께, 나는 무언가를 ‘알아버린’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손에 닿은 사람의 가장 강렬한 감정을 잠시 증폭시키는 힘* 같은 것을…
눈앞의 한예진 선배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주저앉아 버렸다.
젠장, 이 고대의 마법의 힘, 어쩐지 시작부터 대형 사고다! 그것도 내 인생 최고 난이도의 로맨틱 코미디로!
“선… 선배…? 방금 그건…!”
나는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선배의 얼굴은 이제 삶아놓은 문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이 엄청난 비밀과 함께 어떻게 이 혼돈을 헤쳐나가야 할까? 그리고 선배의 저 고백 아닌 고백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마법의 장난이었을까?
망했다. 진짜 망했다. 내 평범한 대학 생활은 오늘부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