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심연의 잔향
어스름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콘크리트 빌딩 숲 사이로 마지막 햇살이 힘없이 부서지며, 하늘은 진한 보라색에서 검은 남색으로 물들어갔다. 민준은 퇴근길, 땀으로 축축한 셔츠를 대충 걷어 올리며 지하철 계단을 올랐다. 매일 똑같은 풍경, 똑같은 소음, 똑같은 피로가 그를 짓눌렀다. 좁은 자취방에 도착하면 기다리는 것이라곤 싸구려 편의점 도시락과 켜켜이 쌓인 설거지뿐이었다.
삑- 삑- 도어록이 답답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눅눅한 공기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에어컨을 켜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이 끈적함은 여름 내내 그를 괴롭혔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거실로 들어섰을 때, 민준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아주 미묘한 이질감이었다.
“내가 뭘 흘렸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열쇠 꾸러미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분명 아침에는 가지런히 놓아두었는데,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모퉁이에 살짝 비껴나가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대충 던져두었을 수도 있고, 미세한 진동 때문에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피곤이 부른 착각이겠거니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며칠 전 사다 놓은 탄산음료가 없었다. 대신 어제 마시고 남은 맥주캔이 엉뚱하게 음료수 칸에 놓여 있었다.
“이상하네. 내가 이렇게 칠칠맞았나?”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정리벽까지는 아니어도, 물건을 놓는 자리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피곤 탓으로 돌렸다. 최근 야근이 잦아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
민준은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2분 30초. 삐-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레인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방 불빛 아래,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알림인가 싶어 손을 뻗는 순간, 탁-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 형광등이 깜빡이더니 꺼져버렸다.
“젠장, 또야?”
이 아파트가 좀 오래되긴 했다. 전등이 가끔 나가거나 깜빡이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는 욕지거리와 함께 일어나 스위치를 몇 번 눌러봤다. 켜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 불빛을 켜고 현관 옆의 두꺼비집으로 향했다. 차단기가 내려가 있었다. 메인 차단기가.
“아니, 이건 또 뭐야.”
메인 차단기는 여태껏 한 번도 내려간 적이 없었다. 민준은 차단기를 올렸다. 찰칵- 소리와 함께 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거실과 주방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기분 탓인가…”
그는 다시 도시락을 데우러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전자레인지 타이머가 5분으로 늘어나 있었다. 분명 2분 30초로 맞췄는데. 설마 이것까지 전기 문제일까? 민준은 찜찜한 기분을 애써 지우려 애쓰며 다시 2분 30초로 시간을 조절했다.
밤 11시, 민준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피로가 이제야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잠들기 직전, 그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스륵- 스륵-
어디선가 긁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손톱으로 나무 바닥을 긁는 것 같은, 작지만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 민준은 눈을 부릅떴다. 소리는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분명 거실 쪽이었다.
“누구세요?”
그는 바보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그 혼자 살았다. 옆집은 비어 있었고, 위아래 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다시 소리에 집중했다.
스륵- 탁- 스르륵-
이번엔 뭔가 떨어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마치 플라스틱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민준은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그저 고양이가 들어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층수에는 고양이나 쥐가 들어오기 쉽지 않다.
그는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스르륵-하는 소리가 바로 문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문에 몸을 기댄 채 바닥을 긁는 것처럼.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 둘, 셋.
그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확 열었다.
“으악!”
텅 비어 있었다.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휴대폰 불빛만이 허망하게 흔들렸다. 민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소파, 테이블, TV.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릇들이, 컵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그릇과 컵들이 모여 있던 가운데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그것에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그것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었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복잡하고 기괴하며, 어떠한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뒤틀린 선들의 조합. 마치 신경 세포나 혈관을 묘사한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발견될 법한 고대 유물의 일부 같기도 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민준의 뇌리에 차가운 칼날이 스치는 듯한 섬뜩함이 지나갔다.
“이게… 뭐야?”
민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무거운 냄비가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그는 황급히 휴대폰 불빛을 주방으로 돌렸다.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들이 전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들이 그의 발밑을 향해 섬뜩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보았다. 어둠 속에 잠긴 싱크대 모퉁이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를.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물거리고,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의 잔상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심장이 귓가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스르륵- 스르륵-
이번에는 소리가 그의 바로 뒤, 침실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마치 침대 시트가 끌리는 소리 같았다. 민준은 돌아서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거실의 어둠 속에서 기묘한 그림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악몽이 되었다.
탁자에 놓여 있던 나무 조각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뒤틀린 선들이 더욱 선명해지며, 거기서 어딘가 불쾌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그리고 침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어둠 속에서, 그는 보았다.
형체 없는 검은 손이, 그의 침대 시트를 잡아끌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을.
동시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그의 귓가에 정체불명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언어도 아니었고,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 듯한,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의 현현이었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휘둥그레졌고, 그는 그저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꿰뚫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이 도시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공포의 시작.
그의 눈앞에 있던 테이블 위의 나무 조각은, 이제 꿈틀거림을 멈추고 거대한 눈동자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깊고 푸른 심연에서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