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운명의 서막
천하제일 무림대회. 그 이름만으로도 강호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 무림맹의 중심에 우뚝 솟은 현무궁의 대광장은 마치 하늘이 내려앉은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수백 년 된 거목들이 빼곡히 들어선 숲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경기장이 위용을 뽐냈다. 붉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마치 살아있는 핏빛 용처럼 꿈틀거렸고, 그 아래로 오색찬란한 문파의 깃발들이 물결쳤다.
수많은 강호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검을 든 자, 장풍을 날리는 자, 은밀한 독술을 익힌 자,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서 군림하는 아홉 개 명문정파와 오대사파의 고수들까지. 그들의 눈빛에는 각기 다른 욕망이 서려 있었다. 천하제일의 명예, 문파의 부흥, 혹은 그 너머의 숨겨진 비밀까지. 그러나 그 어떤 욕망도 오늘 이 대회의 진정한 무게에는 미치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 수많은 인파 속,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회색 도포 자락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미미하게 흔들릴 뿐, 마치 주변의 풍경에 스며든 그림자 같았다. 내 이름은 설하랑. 사람들은 나를 ‘떠도는 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림자 눈’이라 칭하기도 했다. 무공은 그저 호신에 불과했으나, 한 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으며, 한 번 파고든 의문은 기어이 실체를 드러내게 만드는 끈기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금, 이 거대한 대회에서도 나는 무언가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랑아, 넌 대체 왜 이런 곳에 온 거냐?”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던 익숙한 목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갈래머리에 도톰한 볼살, 늘 넉살 좋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내는 청룡채의 장년 무사, 당철우였다. 그는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철우 형님. 형님이야말로, 이런 살벌한 곳에서 뭘 얻겠다고.”
나는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철우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흥, 난 그저 우리 채주의 심부름꾼일 뿐이야. 허나 너는 다르지. 네가 그냥 이런 인파 속에 숨어들 리가 있나. 대체 뭘 꾸미는 게냐?”
“꾸미다니요. 그저 천하제일인의 탄생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말을 돌렸지만, 당철우는 내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쳇, 넌 눈빛부터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는 사람 같아. 하여간 조심해라. 이번 대회는 뭔가 수상해. 무림맹의 공고문을 보았느냐? ‘천하의 운명’이라는 거창한 말을 왜 굳이 붙였겠어? 게다가 예전에 없던 ‘특별 규칙’도 많고… 왠지 싸한 기운이 돌더군.”
당철우의 말은 내가 느끼고 있던 불길한 예감과 일치했다. 이번 대회는 단순한 무위의 겨룸이 아니었다. 분명, 그 뒤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때, 대광장의 중앙, 가장 높이 솟은 단상 위로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궁의 궁주이자, 현재 무림맹주의 자리에 있는 진무현이었다. 그의 강렬한 기운이 주변의 소란스러운 공기를 단숨에 제압했다. 장내는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강호의 영웅들이여!”
진무현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 웅장하게 퍼져나갔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 모였다. 단순한 무위의 우열을 가르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강호는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북방에서부터 불어오는 암흑의 기운이 천지를 뒤덮으려 하고, 이는 곧 무림 전체의 멸망을 의미한다!”
진무현의 말에 장내는 술렁였다. 그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멸망’이라는 단어를 꺼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오랜 역사 속, 현무궁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秘典)에는 이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천지현황패(天地玄黃牌)’의 주인을 찾아, 그로 하여금 ‘운명의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것!”
나는 진무현의 말에 집중했다. 천지현황패. 이름만 들어도 아득한 고대의 기운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듣기로는 그 패를 소유한 자만이 천지의 기운을 다스려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천하제일 무림대회는 바로 그 천지현황패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성스러운 의식이다! 우승자는 곧 천지현황패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강호의 구원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장내는 일순간 폭발할 듯한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단순한 무림 고수들이 아니라, 이제는 강호의 운명을 짊어질 ‘구원자’를 뽑는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는 경외감과 함께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환호와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 단상 아래, 진무현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이 자리한 귀빈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천음문의 문주, 은하율. 그녀는 강호에서 ‘천음마녀’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음공(音功)으로 명성을 떨쳤던 여인이었다. 고아한 자태로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몸을 휘청거리더니 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백지장처럼 창백해졌고, 푸른 혈관이 거미줄처럼 도드라졌다.
“문주님!”
옆에 있던 제자들이 놀라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은하율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대광장이 순식간에 싸늘한 정적으로 뒤덮였다.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평화롭던 대회의 서막은 이렇게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사람들은 공포와 혼란에 질려 웅성거렸고, 일부는 비명을 질렀다. 진무현마저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굳어진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나는 당철우 형님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이, 이미 내 시선을 은하율 문주의 시신에 고정했다. 수많은 발소리와 혼란 속에서도, 내 귀에는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미미한 향취가 감지되었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싸늘한, 묘한 향기. 그리고 내 눈은 다른 이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할 미세한 흔적을 포착했다. 그녀의 창백한 입술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묻어 있는 검푸른 점.
당철우 형님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하랑아, 이거 대체 무슨…!”
“독입니다, 형님.”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것도 아주 정교하고 은밀한, 심장으로 가는 혈맥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킨 독. 보통의 방법으로는 절대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독은 아주 특별합니다.”
내 시선은 은하율 문주의 시신을 넘어, 혼란에 빠진 군중 속을 훑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중 몇몇의 눈빛은 너무나 차분했고, 어떤 이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 대회는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피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피는 단순히 은하율 문주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호의 운명을 건 대회라더니, 그 운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거대한 그림자를 쫓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대회가 아니었다. 거대한 음모와 미스터리의 서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