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재의 심장 속에서
잿빛 하늘 아래, 금속성 비가 끈질기게 내렸다. 빗방울은 고층 빌딩의 뼈대와 녹슨 철골 구조물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며, 바닥에 고인 오염된 물웅덩이에 닿아 희미한 푸른빛을 튀겼다. 한때는 번화했을 도시의 심장은 이제 거대한 금속 무덤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이곳, ‘더스트 존’이라 불리는 폐허 속에서 이진은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은 왼쪽 안구에 이식된 저급 사이버네틱 렌즈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열원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렌즈는 깜빡이며 전방 30미터 지점에서 미약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폐기된 ‘코퍼스’사의 물류창고 잔해였다. 며칠째 물과 에너지 슬라이스를 아껴 써온 이진의 뱃속에서는 공복을 알리는 묵직한 통증이 울렸다. 오늘 반드시 뭔가를 찾아야 했다.
이진은 허름한 롱 코트 주머니 속에서 다용도 칼날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한때 날카로웠을지 모르나, 이제는 수많은 긁힘과 녹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고, 마디마디는 굳은살로 딱딱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증거였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건조한 공기가 폐를 긁는 듯했다. 물류창고는 이미 수많은 스크랩퍼들에게 털린 지 오래인 듯했다. 부서진 팔레트와 찢겨나간 상자, 그리고 정체 모를 액체 자국만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이진의 사이버네틱 렌즈가 연신 깜빡이며 바닥을 스캔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배터리 코어, 데이터 슬라이스, 하다못해 먹을 만한 합성 식량이라도 좋았다. 그 무엇이라도 말이다.
그때였다. 렌즈가 창고 안쪽 깊숙한 곳, 무너져 내린 벽 뒤에서 미약하지만 일정한 에너지 신호를 감지했다. 이진의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빨라졌다. 희망은 사치였지만, 생존을 위한 본능은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헤치고 벽 너머로 몸을 숙였다.
그곳에는 쓰러진 선반 아래 깔린 채 녹슨 금속 상자가 있었다. 상자 한쪽에는 ‘코퍼스’사의 로고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아직 개봉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이런 곳에 이런 게 남아있다니. 이건 행운이었다. 아니,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었다. 더스트 존에서의 행운은 대개 더 큰 불행의 전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었다. 폐허의 침묵은 종종 죽음의 전조가 되곤 했다. 이진은 선반의 잔해를 치우고 상자를 끄집어냈다. 잠금장치는 오래전에 부식되어 떨어져 나간 듯했다.
상자를 열자, 내부에는 예상치 못한 것이 들어 있었다. 작은 사이즈의 ‘뉴로-칩’ 몇 개와 함께, 낡았지만 멀쩡해 보이는 ‘컴팩트 에너지 셀’ 하나가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손바닥만 한 오래된 ‘데이터 슬라이스’ 하나. 희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는 귀한 보급품이었다. 에너지 셀은 그의 무기나 소형 스캐너를 충전하는 데 쓰일 수 있었고, 데이터 슬라이스는 정보 상인에게 팔아 합성 식량을 살 수 있었다. 뉴로-칩은… 이건 좀 애매했다. 불법적인 경로로 팔 수는 있겠지만, 사용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됐다.”
이진은 재빨리 내용물을 코트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의 사이버네틱 렌즈가 경고음을 울렸다. 동시에 바깥에서 들려오는 거친 발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외침.
“이봐! 거기 누구야!”
망할. 이진은 이를 악물었다. 스크랩퍼들이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 다섯 명 이상. 창고 안쪽으로 들어오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들의 복장은 이진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무자비한 인상과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은 불법 증강 장치들이 그들이 평범한 생존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봐, 친구. 뭘 주워 먹으려다 들켰군.”
가장 앞서 걷던 남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한쪽 팔에 낡은 기계 의수를 달고 있었고, 그 의수 끝에는 녹슨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희미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눈은 마치 굶주린 짐승 같았다. 이 지역의 악명 높은 스크랩퍼 집단, ‘하울러’의 일원임이 분명했다.
이진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등 뒤는 무너진 벽이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든 다용도 칼날을 꽉 쥐었다. 상대는 다섯 명. 그것도 무장을 한 자들이었다. 싸움은 무모했다.
“나갈 길은 없지? 가져간 거 전부 내놓고,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하울러의 리더가 기계 의수의 갈고리를 흔들며 위협했다. 그들의 눈은 이진의 코트 주머니를 탐욕스럽게 훑었다. 이진은 그들의 눈빛을 읽었다. 이들은 그저 물건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폐허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인간성은 이미 닳아 없어졌으리라. 그들은 재미를 원했다. 고통을 주거나, 빼앗는 데서 오는 쾌감을.
“이런 쓰레기 같은 동네에서 뭘 빼앗아 갈 게 있다고.” 이진이 억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하하하! 이봐,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봐라? 제법인데?”
하울러 중 한 명이 비웃으며 다가왔다. 이진은 상대의 움직임을 렌즈로 정확하게 분석했다. 느리지만 예측할 수 없는 덩치. 이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는 창고의 복잡한 잔해 속으로 뛰어들었다.
“놓치지 마! 저 새끼가 뭘 가지고 도망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귀한 걸 거야!”
하울러 리더의 목소리가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이진을 추격해왔다. 이진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부서진 기계 잔해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곡예하듯 헤쳐 나갔다. 그의 사이버네틱 렌즈는 끊임없이 최적의 도주 경로를 계산해냈다.
그는 문득 잊고 있던 창고 구석의 환기구를 떠올렸다. 성인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였다. 그곳까지 간다면, 이 놈들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다! 잡았다, 이 더러운 쥐새끼!”
갈고리 의수를 단 리더가 날카로운 칼날을 이진의 옆구리로 쳐들었다. 이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피했다. 칼날은 낡은 철골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그 틈을 타 이진은 환기구 입구로 몸을 던졌다. 낡은 금속판은 그의 무게를 간신히 지탱했다.
그는 머리부터 쑤셔 넣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밀어 넣는 동안, 낡은 코트가 여기저기 찢겨나갔다. 그의 발목을 붙잡으려던 하울러들의 손이 헛손질했다.
“젠장! 놓쳤어!”
리더의 격앙된 목소리가 환기구 안까지 들려왔다. 이진은 아랑곳 않고 몸을 앞으로 밀었다. 좁고 어두운 통로는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지만, 바깥의 추격자들보다는 나았다. 한참을 기어갔을까, 마침내 환기구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바깥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밖으로 빼냈다. 폐기된 발전소의 벽 뒤편, 아무도 오지 않을 만한 외진 곳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땀으로 축축한 얼굴을 스쳤다. 그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하울러들은 환기구 입구를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진이 너무 멀리 달아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진은 지친 몸을 벽에 기댔다. 심장이 여전히 격렬하게 뛰었고, 폐는 타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더스트 존의 탁한 공기가 그의 허파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눈빛은 지쳐 보였지만, 동시에 지독한 생존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에너지 셀과 데이터 슬라이스, 뉴로-칩이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작은 승리였다. 하지만 이 승리가 얼마나 더 그를 살게 할지는 미지수였다. 내일은 또 다른 폐허를 헤매야 할 테고, 또 다른 위험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진은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빗줄기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저 너머, 높고 어두운 장벽으로 둘러싸인 ‘아크로폴리스’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곳은 더스트 존의 삶과는 완벽하게 단절된, 부와 기술의 낙원이었다. 이진의 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다른 차원의 도시.
“언젠가는…”
그는 중얼거렸다. 무엇을 말하려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겠다는 다짐인지, 아니면 그저 이 빌어먹을 더스트 존을 벗어나겠다는 희망의 속삭임인지.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어쩐지 눈물처럼 느껴졌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진은 다시 마스크를 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가야 했다. 어떻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