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늘 그랬듯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유이는 눈을 떴다. 흐린 햇살이 창문 없는 벽의 틈새로 겨우 스며들어, 낡은 방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폐허 속에서 찾아낸 천 조각들로 꾸며진 작은 공간. 삐걱이는 나무 침대에서 내려서자, 흙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맨발을 감쌌다.
벽에 기대어 놓은 녹슨 양철 물통에는 어제 받아온 빗물이 희미한 물소리를 내며 고여 있었다. 유이는 작은 컵에 물을 따랐다. 투명하고 깨끗한 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였다. 천천히 목을 축였다. 몸속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이 잠들었던 정신을 깨웠다.
낡은 천 조각 위, 어둠 속에서 웅크린 작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솔’이었다. 이젠 세상에 몇 안 남은 생명체 중 하나인 작은 고양이. 유이가 다가가자 솔은 천천히 눈을 떴다. 호박색 눈동자가 졸린 듯 깜빡였다.
“좋은 아침.”
유이가 낮게 읊조리자 솔은 먀옹, 하고 짧게 울었다. 둘만의 언어였다. 솔은 털을 한 번 쓱 정리하고는, 유이의 발치에 몸을 비볐다. 유이는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이 작은 온기가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은 뭘 해야 할까. 식량 탐색, 아니면 물길 확인? 어제의 비로 물줄기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다. 생존의 매일은 새로운 변수와의 싸움이었다.
유이는 낡은 배낭을 메고 나섰다. 솔은 익숙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금이 간 아스팔트가 밟혔다. 높게 솟아 있던 건물들은 이제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듯 이름 모를 풀들이 돋아나 있었다.
고요함.
새소리조차 허락되지 않은 듯한, 고요만이 맴도는 세계였다. 오직 유이의 발걸음만이 그 견고한 고요를 조심스럽게 깨뜨릴 뿐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으면 좋겠어, 솔.”
솔은 대답 대신 앞서 걷는 유이의 발목에 꼬리를 살랑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이 옛 상점가 쪽으로 향했다. 어쩌면 낡은 통조림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대부분은 빈 껍데기뿐이었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따스한 온기가 폐허 위로 내려앉았다. 유이는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어 잠시 쉬었다. 솔은 그녀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앉았다.
저 멀리, 한때 번화했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그 시절이 아득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조차 그 모습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가 어땠을까.”
솔은 그저 눈을 감고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은 사치가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유이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 유이는 조금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어쩌면 아직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라면,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빽빽하게 우거진 숲처럼 변해버린 건물 잔해들을 헤치고 나아가자, 뜻밖의 풍경이 나타났다.
작은 연못이었다. 고인 물이 아니라,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었다. 주변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세상의 모든 찬란한 색이 이곳에 응축된 듯했다. 놀랍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솔은 쪼르르 달려가 연못가에 앉아 물을 핥았다. 유이는 천천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투명한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우면서도 생생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물가에 핀 꽃들을 보았다. 연약해 보이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끈질긴 생명이었다.
메마른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액체가 아스라이 맺혔다. 그것은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희망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솔, 여기야. 우리가 찾던 곳.”
솔은 고개를 들어 유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작은 눈빛 속에도 알 수 없는 평화가 잔잔히 일렁이는 듯했다.
유이는 조심스럽게 작은 병에 샘물을 담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연못은 그녀의 새로운 비밀 장소가 될 터였다. 주변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몇 송이를 조심스럽게 꺾어 배낭 한쪽에 꽂았다.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어느새 머리 위를 뒤덮었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옅은 노을이 잿빛 하늘을 은은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잿빛 세상에 드리운 붉은색이 마치 작은 희망 같았다.
거처에 도착하자, 유이는 꽃을 물병에 꽂았다. 단조로운 방 안에 작은 생기가 돌았다. 솔은 연신 유이의 곁을 맴돌다, 이내 낡은 천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유이는 창문 없는 벽에 기댔다. 고요한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따스한 확신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손에 쥔 물병 속 꽃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작게 반짝이는 듯했다.
내일도, 또 살아갈 것이다.
이 잿빛 세상 속에서, 그녀는 매일 작은 기적들을 찾아내며 끈질기게 살아갈 것이다. 솔과 함께, 그리고 작은 희망을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