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인 도시, 크루스 항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하늘은 두꺼운 매연 구름에 가려 별 한 점 보이지 않았고, 숨쉬는 공기는 쇳내와 기름때로 절어 있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왜소했고, 표정 없는 얼굴에는 오늘을 버텨냈다는 안도감과 내일을 걱정하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아스테리아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야, 류진! 거기 서!”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에 류진은 짐짝처럼 들쳐멘 부품 뭉치를 고쳐 맸다. 녹슨 철제 골목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속도로 내달렸다. 이 끈질긴 추격자들은 어제도, 그제도 그를 쫓았다. 제국의 법망은 평민들에게만 유독 가혹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류진에게는 고철 하나 줍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이 썩어빠진 규칙을 깨야만 했다.
“젠장, 저 돼지 같은 놈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류진은 멈출 수 없었다. 손에 쥔 부품은 며칠을 굶은 여동생의 저녁 식사와 맞바꿀 수 있는 귀한 보물이었다. 폐기물 더미 속에서 겨우 찾아낸 고성능 서보 모터였다. 제국제 기동 병기에 들어가는 고급 부품이니, 암시장에서 꽤나 쳐줄 터였다.
골목을 벗어나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욱 끔찍한 풍경이었다. 제국의 철혈 통치를 상징하는 거대한 기동 병기, ‘심판자(Judicator)’가 도시 중앙 광장에 멈춰 서 있었다. 육중한 강철 몸체는 십수 층 건물 높이에 달했고, 육중한 팔에 달린 집게 발톱은 폐허가 된 건물 잔해를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버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쾅! 쾅!
심판자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리고 주변 건물들의 유리창이 파르르 떨렸다. 조종석에서 번쩍이는 붉은 눈은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 같았다. 류진은 황급히 쓰러진 노점상 차량 뒤로 몸을 숨겼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분노였다. 공포를 넘어선 끓어오르는 분노.
“이 빌어먹을 괴물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심판자는 광장을 가로지르며 잔해를 치우는 척했지만, 그들의 진정한 목적은 공포를 심는 것이었다. 매달 한 번씩, 제국의 자원 수탈에 반항하는 움직임이 포착될 때마다 심판자는 이렇게 도시에 나타나 힘을 과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시장 거리가 단 몇 분 만에 폐허로 변했다. 그 잔해 속에는 분명 누군가의 삶이, 희망이 짓밟혔을 터였다.
저 멀리서 제국군 경비정이 쉴 새 없이 경고음을 울리며 시민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레이저 캐논을 들쳐 멘 병사들이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밀치고 발로 차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였다. 류진은 그들의 눈빛에서 일말의 인간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류진! 너 여기서 뭐 해? 빨리 와!”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기물로 가득 찬 건물 틈새에서 한 청년이 손짓하고 있었다. 민이었다. 류진과 함께 고철을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동료이자, 같은 눈을 가진 자였다.
류진은 심판자의 움직임을 살피며 민에게로 달려갔다. 좁은 통로로 들어서자 민이 숨을 헐떡이며 그를 맞았다.
“젠장, 저 놈들이 또 난리야. 오늘 저녁 장사 다 망쳤잖아!” 민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도 류진과 똑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늘 있는 일이지, 뭘. 오늘은 좀 더 심하네.” 류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다행히 이걸 건졌어. 서보 모터야.” 그는 부품 뭉치를 내밀었다.
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어디서? 진짜 귀한 건데?”
“쓰레기 처리장 가장 깊은 곳, 제국군도 손대지 않는 곳에서 찾았지.” 류진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우리 이번 주 식량은 걱정 없겠어.”
그때, 민의 손에 쥐여 있던 낡은 휴대용 통신 장치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빛은 붉은색이었다. 약속된 신호였다.
“뭐야, 벌써 시간인가?” 민이 중얼거렸다.
류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지금 막 끝낸 하루의 고통스러운 생존은 시작에 불과했다. 밤은 그들에게 또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바로, 이 빌어먹을 제국에 맞서는 아주 작지만 의미 있는 저항.
“준비됐어?” 민이 물었다.
류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광장에서 파괴를 일삼는 심판자를 향하고 있었다. 저 거대한 강철 괴물 아래 짓밟힌 수많은 생명들. 그들의 절규는 류진의 귓가에 맴도는 끊임없는 불꽃이었다.
“이번엔 좀 더 가까이 접근해야 할 거야.” 민이 나직이 말했다. “놈들이 새로 들여온 전술 데이터를 확보해야 해. ‘파수꾼’ 기지에 전달해야 하거든.”
파수꾼. 그들의 은밀한 저항 조직 이름이었다. 제국의 눈을 피해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작은 반란군.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고철과 타오르는 의지뿐인 평민들의 모임.
류진은 자신의 품 안에서 낡은 공구 주머니를 꺼냈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그 어떤 제국 병사의 손보다도 단단하고 정확했다.
“심판자가 오늘 같은 날엔 경비를 강화할 테니, 평소보다 어려울 거야.” 류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방법은 찾아야겠지.”
그는 폐기물 더미에 기댄 채, 눈앞에 펼쳐진 잿빛 도시와 그 위에 군림하는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를 응시했다. 이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야 했다. 그 빛이 설령 작은 불씨에 불과할지라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불태울 거대한 화염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간다.” 류진은 짧게 말했다.
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통로 끝을 가리켰다. 제국의 심장부를 향한 또 한 번의 위험한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밤, 그들은 제국의 철옹성에 작은 균열 하나를 낼지도 몰랐다. 혹은, 영원히 잿빛 도시의 먼지 속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류진의 심장이 잿빛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격렬하게 울렸다. 이 분노를, 언젠가는 저 강철 괴물들에게 갚아줄 날이 오리라.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