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밤은 늘 그랬다. 수많은 불빛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반짝였고, 그 아래 펼쳐진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상자 속 작은 조각들처럼 빼곡했다. 스무 층짜리 건물, 그중 열네 층에 자리한 지아의 작은 보금자리는 밤이 되면 유독 아늑했다. 창밖으로는 멀리 도심의 상징이 손톱만 하게 보였고, 그 야경을 배경 삼아 지아는 작업실 겸 거실 한 켠에 놓인 책상에 앉아 태블릿 펜을 놀렸다.
오늘 마감해야 할 삽화가 남아있었지만, 어째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자꾸만 시선이 왼쪽 책장으로 향하는 건, 아마도 방금 전 들린 ‘툭’ 소리 때문일 것이다.
“밤아, 너 또 뭐 떨어뜨렸어?”
지아가 고양이에게 물었지만, 검은 고양이 ‘밤’은 지아의 시선이 닿자마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우아하게 하품만 했다. 길게 늘어지는 하품 끝에 핑크색 혀가 살짝 보였다. 책장은 여전히 빽빽했고, 떨어진 책은 없었다. 지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작업에 몰두하려 했지만, 이내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아까는 책상 모서리에 두었던 머그컵이 스르륵, 하고 반 뼘 정도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한가… 헛것이 다 보이네.”
지아는 중얼거렸다.
그날 밤 이후, 아파트에서는 묘한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분명 제자리에 두었던 리모컨이 엉뚱하게도 주방 식탁 위에서 발견되거나,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소파 밑에 툭, 하고 떨어져 있기도 했다. 가끔은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작은 탁상시계가 ‘덜컥’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어휴, 이러다 중요한 마감도 놓치겠네.”
밤에게 한탄하듯 이야기하면, 밤은 그저 긴 꼬리를 흔들며 무심하게 제 할 일을 했다. 간혹 지아가 깜짝 놀랄 때면, 밤은 동그란 초록색 눈을 들어 잠시 지아를 응시하곤 했다. 마치 ‘익숙해지렴’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느 비 오는 주말 오후였다. 지아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도시의 소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른한 평화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때, 부엌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아는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컵이 깨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분명 유리컵은 싱크대 가장자리가 아닌 안쪽에, 단단히 놓여 있었다. 바람이 들어올 창문도 없었다.
“이건… 정말 이상하잖아.”
그때부터 지아는 뭔가 자신의 보금자리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집이 오래되어 낡은 것인가? 아니면 층간 소음 때문에 아랫집이나 윗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인가? 그러나 조용히 귀 기울여 봐도, 소음은 늘 지아의 집 안에서만 발생했다.
그녀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자주 움직이던 물건들 옆에 작은 메모를 붙여두거나, 조용히 녹음기를 켜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메모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옆의 물건은 자리를 옮겼고, 녹음기에는 텅 빈 공간의 소리만 가득했다. 밤은 가끔 허공을 빤히 쳐다보거나, 꼬리 끝을 살랑이며 알 수 없는 공간을 향해 미묘하게 반응하곤 했다.
두려움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묘한 호기심과 어쩌면 아주 조금의 외로움이 채웠다.
이 모든 현상들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는 것처럼, 혹은 조용히 관심을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지아는 거실의 작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작은 잎사귀 하나가 시들해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가위를 들어 잘라주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작업노트를 펼쳤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 잘라서 테이블 위에 두었던 그 작은 잎사귀가, 말끔하게 휴지통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지아는 멍하니 휴지통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세요?”
정적이 흘렀다.
지아는 숨을 참고 기다렸다. 혹시 또 무엇인가 움직일까, 아니면 소리가 들릴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아는 실망감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작은 돌멩이 장식품이 있었다. 여행지에서 주워온, 손바닥만 한 매끄러운 돌이었다. 그 돌이 아주 미세하게, 아주 조용히, ‘또르르’ 소리를 내며 살짝 굴러갔다. 마치 대답처럼. 그리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반 뼘 정도 옆으로 이동해 멈췄다.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그래, 있었구나. 혼자였는데… 혼자가 아니었네.”
그날 이후, 지아의 아파트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물건들은 제자리를 이탈하곤 했다. 때로는 갑자기 라디오가 켜져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지아가 읽던 책이 다음 페이지로 살짝 넘어가 있기도 했다. 가끔은 지아가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나오면, 밤새 차가워진 거실 바닥에 발매트가 ‘쓱’ 하고 밀려와 그녀의 발을 감싸기도 했다.
지아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출근 준비를 하며 혼잣말을 했다.
“음, 오늘 아침은 따뜻한 커피가 당기는데. 알지?”
그러면 잠시 후, 보온병에 담겨 있던 따뜻한 물이 커피포트에 담겨 살짝 흔들리곤 했다. 지아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내렸다.
밤도 점차 익숙해졌다. 허공에 발을 뻗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장난치는 듯한 몸짓을 하기도 했다.
지아는 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이름을 붙여줄까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저 ‘거기 있는 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밤, 지아는 야근에 지쳐 돌아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도시의 소음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불 꺼진 아파트는 유독 적막했다. 지아가 거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탁상 스탠드의 불빛이 ‘딸깍’ 소리를 내며 켜졌다. 은은한 오렌지색 불빛이 어두웠던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지아는 스탠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누군가 대답해 줄 리 없는 공간이었지만, 지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현대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 지아의 작은 아파트는 그녀만의 조용하고 따뜻한 보금자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친구와 함께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일상은 여전히 바빴지만, 밤늦게 돌아오는 길, 혹은 홀로 작업을 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한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은 외로운 도시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작고 소중한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파트에는, 작은 온기가 늘 함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