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웠다. 낡은 방탄 조끼는 찢기고 헤졌지만, 그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먼지에 절어붙은 얼굴 위로 짐승 같은 눈빛이 번뜩였다. 오른손에 들린 것은 녹슨 쇠 파이프였다. 그 끝에는 날카롭게 갈린 파편들이 용접되어 있어, 흉물스러운 망치처럼 보였다. 수없이 많은 ‘그것들’의 뇌수를 터뜨리고, 수많은 인간들의 악의를 찍어 누르며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표였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지 벌써 5년. 하지만 지훈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5년 전, 그 지옥 같은 순간.
그때 우리는 세 명이었다. 지훈, 민준, 그리고 혜원.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미래를 꿈꾸던 평범한 청춘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좀비들이 창궐하고, 도시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우리는 낡은 트럭 한 대로 도망치듯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서로를 의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민준은 늘 앞장서서 길을 찾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리더였다. 지훈은 그런 민준을 진심으로 믿었다. 혜원 역시 민준을 오빠처럼 따랐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식량을 찾기 위해 들어선 폐허가 된 마트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좀비 무리와 마주쳤다.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퇴로마저 막혀버린 절망적인 상황. 민준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지훈도 혜원도 민준을 도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좀비들이 혜원의 다리를 물었다. 혜원의 비명소리가 마트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혜원아! 버텨!” 지훈이 달려들었다.
“안 돼, 지훈아! 저항하지 마! 어차피 감염됐어!” 민준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는 이미 도망칠 길을 찾고 있었다. 지훈은 순간 망설였다. 혜원의 눈빛은 이미 공포와 체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훈아… 도망쳐… 끄흑…” 혜원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그 순간, 민준은 지훈의 어깨를 밀쳤다. 강한 충격과 함께 지훈은 휘청거렸다. 그리고 민준은 그 틈을 타 마트의 유일한 출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지훈은 민준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혜원 역시. 민준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훈은 절규했다. “민준아! 이 비겁한 자식!”
하지만 민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혜원은 이미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훈은 혜원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수많은 좀비들의 팔이 그를 밀쳐냈다. 혜원의 얼굴이 끔찍하게 변해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다. 그 찰나의 순간, 지훈은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다만, 혜원의 마지막 비명과 민준의 배신 가득한 뒷모습만이 생생하게 뇌리에 박혔다.
그때부터 지훈의 삶은 오직 복수를 향한 하나의 길로 재편되었다. 혜원과 민준의 흔적을 쫓아 5년. 폐허가 된 도시를 떠돌며 지훈은 뼈아픈 진실을 알게 되었다. 민준이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었음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니,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늘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왔던 뼛속까지 악랄한 인간이었다.
민준은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이룬 작은 거점, ‘새벽 마을’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언변과 기회주의적인 면모로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희망의 인도자’라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훈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오늘, 지훈은 ‘새벽 마을’의 외곽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 서 있었다. 밤은 깊었고, 보초들은 긴장이 풀린 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낡은 감시탑에 앉은 한 명의 보초는 지루한 듯 하품을 길게 했다.
지훈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넝마가 된 외투 속에서 챙겨온 절단기가 스치듯 철조망을 끊어냈다. ‘칭… 칭…’ 작은 소음조차 밤의 정적을 찢는 듯했지만, 보초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능숙하게 철조망 틈새를 비집고 마을 안으로 잠입했다.
마을은 생각보다 안락해 보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은은한 불빛. 지옥 속에서도 그들만의 낙원을 일궈낸 듯했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위선으로 보였다. 민준의 손으로 일궈낸 위선.
민준의 거처는 마을 중앙에 있는 가장 크고 튼튼한 건물이었다. 다른 이들의 집은 허름한 움막 수준이었지만, 그의 집만은 꽤나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탐욕스러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둥지 같았다.
지훈은 건물 뒤편,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으로 향했다. 건물 벽에는 빗물 파이프가 엉성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파이프를 잡고 올라갔다. 오랜 시간 좀비들을 피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고, 폐허를 기어오르며 단련된 몸은 가벼웠다.
민준의 침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창문을 뜯어냈다. 나무로 된 창틀은 썩어 있었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끼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이 밤을 갈랐지만, 실내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묻혔다.
지훈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꽤 넓고 깔끔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침대, 작은 책상,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지도들.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낡은 사진 한 장.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지훈, 민준, 그리고 혜원.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은 사진에 박혔다. 혜원의 환한 미소. 그리고 그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민준. 그는 저 사진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지훈은 망설임 없이 사진을 찢어버렸다. 종이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때였다.
“누구… 읍!”
화장실에서 막 나온 듯한 민준이 지훈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민준의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민준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흐읍… 흐읍… 지, 지훈이…?”
민준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는 지훈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경악한 듯했다.
지훈은 민준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래. 나다. 네가 죽이려 했던 그 지훈이가 돌아왔다.”
민준은 지훈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고 벗어나려 했다.
“지훈아, 오해야!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좀비들이 너무 많았다고! 우리 셋 다 죽을 뻔했어!”
지훈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혜원을 밀쳐냈을 때도? 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때도? 어쩔 수 없었냐고!”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여유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공포만이 가득했다.
“제발… 지훈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너는 몰라… 살아남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살아야 했어…!”
“살아야 했어?” 지훈은 그의 멱살을 더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겨? 네 덕분에 혜원은 끔찍하게 죽었어! 나는 네가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며 혜원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민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지훈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줘…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내가 널 위해 뭐든지 할게…!”
지훈은 민준의 멱살을 풀었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거렸다.
“날 위해 뭐든지? 네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지훈은 낡은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쇠 파이프 끝에 달린 날카로운 파편들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네가 혜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네게 선택권을 주지.”
민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뒤로 기어가려 했지만, 지훈은 그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지훈아! 제발! 살려줘! 난 마을을 이끌어야 해! 나 없으면 다 죽어!”
“흥, 네가 없으면? 이 마을은 네가 없어야 비로소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지훈은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만든 이 가짜 평화는, 네 배신 위에 세워진 거야. 나는 그 기초부터 부숴버릴 거야.”
그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민준의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누구 없어요? 살려줘요! 강도가 들었어!”
지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쇠 파이프가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준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민준의 눈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 빛은 빠르게 꺼져갔다. 그가 입을 열려 했지만, 단말마의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쿵! 쿵! 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민준님! 괜찮으십니까?”
지훈은 민준의 시신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그는 피 묻은 쇠 파이프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횃불을 잡았다. 기름으로 가득 찬 램프를 바닥에 던지고, 불꽃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활활활!’
순식간에 방 안은 불길에 휩싸였다. 지훈은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밖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부수고 있었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갔고, 마을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지훈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는 민준이 쌓아 올린 위선의 탑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절규와 불타는 마을의 비극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지훈의 복수가 끝난 자리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민준의 비겁한 뒷모습도. 복수는 달콤하지 않았다. 아니,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가벼움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걷어냈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폐허가 된 세상, 아직도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이 지옥에서, 지훈은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복수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심연을 헤치고 돌아온 칼날처럼, 그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가 살아남은 이유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