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태양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귀신 들린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한은 낡은 방수포로 얼기설기 가려진 버스 안에서 눈을 떴다. 새벽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젠장, 또 아침이냐.”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팔뚝에는 며칠 전 잔해 더미를 뒤지다 긁힌 상처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제대로 된 소독약이 없어 흙먼지가 그대로 박혀버렸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폐허에서 열병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낡은 배낭을 챙겨 메고 버스 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는 깨진 보도블록과 이름 모를 풀들이 뒤엉켜 있었다. 멀리, 과거에는 마천루였을 건물들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 건물 어딘가에, 사람의 온기는커녕 살아있는 것조차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펼쳐져 있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확장되자, 부서진 자동차들이 도로 위를 거대한 고철 덩어리처럼 점거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를 지나칠 때였다. 지한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포착됐다.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마찰음, 그리고 희미한 숨소리. 등골이 오싹했다. 이 세계에서는 소리 하나하나가 생존과 직결된 정보였다.

그는 즉시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텅 빈 건물들, 부서진 창문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했다. 저벅, 저벅. 불규칙한 발소리였다. 그것은 지한이 흔히 마주치던 그림자들의 소리와는 달랐다. 그림자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존재 자체를 갉아먹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이 소리는… 인간의 것이었다.

“누구야?”

지한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근처 폐차를 향해 던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차체를 때렸다. 침묵. 지한은 숨을 죽였다. 이내, 발소리는 더욱 빨라지더니 어느 건물 뒤로 사라졌다. 지한은 일단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항생제라도 구해야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저 멀리 보이는 대형 쇼핑몰 건물이었다. 과거, 그곳에는 약국이 있었다.

쇼핑몰 입구는 거대한 잔해 더미로 막혀 있었다. 지한은 낡은 철문을 겨우 밀어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내부는 암흑이었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웅장했던 홀의 모습이 드러났다. 찢어진 고급 의류들이 바닥에 뒹굴고, 명품 매장은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진열된 마네킹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쓰레기 더미에서 뭘 찾으라고.”

지한은 낮게 중얼거렸다. 플래시가 비추는 곳마다 폐허가 된 상점들의 흔적이 보였다. 약국은 3층에 있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었다.

3층에 도착하자, 약국이라고 쓰인 희미한 간판이 보였다. 문은 부서져 있었고, 내부 역시 난장판이었다. 약병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곳마저 털린 것인가. 지한은 무너져 내리는 마음으로 약국 안을 샅샅이 뒤졌다. 서랍 하나, 상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한의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공기 중의 습도가 갑자기 낮아진 듯 건조하고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훑었다. 그림자였다. 그것은 형체가 없지만, 존재감은 그 어떤 생물보다 강렬했다.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어둠.

지한은 플래시를 들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약장 뒤쪽의 공간에서 희미하게, 마치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림자의 징후였다. 그것들은 빛을 싫어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잠시 밀어낼 뿐이었다.

“빌어먹을.”

지한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도망치면 약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저 그림자와 맞서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림자들은 생명체의 ‘의지’를 먹고 자랐다. 공포가 클수록 그것은 강해졌다. 지한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지만, 그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약장 가장 아래 칸, 거의 바닥에 붙어 있다시피 한 곳에 작은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처박혀 있었다. 다른 약병들과 달리 깨끗한 상태였다. 지한은 재빨리 상자를 잡아챘다. 안에 든 것은 비닐 랩으로 꼼꼼히 싸인 항생제 두 알과 소독용 알코올 솜 몇 개였다. 기적이었다.

그가 약을 챙기는 순간, 뒤편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차가운 한기가 지한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큭!”

지한은 반사적으로 플래시를 그림자를 향해 비췄다. 그림자는 잠시 움찔하는 듯했지만, 곧 다시 기세를 올렸다. 그것은 그가 약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지금의 공포를 양분 삼아 커지는 듯했다.

도망쳐야 했다. 지한은 약을 품에 안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지한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그를 압박해왔다. 지한의 머릿속에 온갖 절망적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어차피 죽을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림자가 내뿜는 냉기가 지한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그는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며 필사적으로 내려갔다. 찢어진 신발 밑창이 미끄러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1층 홀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 부서진 입구에서 희미한 바깥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림자는 지한의 뒤통수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제 그 형태가 더욱 선명해졌다. 거대한 검은 아지랑이가 그의 시야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지한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구로 몸을 던졌다.

쾅!

그는 잔해 더미를 넘어 바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쇼핑몰 입구는 다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림자는 햇빛을 싫어했다. 그 안에서 아른거리던 검은 그림자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다시 어둠 속으로 스러져갔다.

지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지탱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품 안의 약을 확인했다. 다행히 무사했다. 주저앉아 겨우 숨을 고른 그는 상처 부위에 알코올 솜을 문지르고 항생제를 삼켰다. 쓰디쓴 약맛이 입안에 퍼졌다.

서서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더욱 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지한은 멀리 보이는 노을을 바라봤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겨우. 살아남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동시에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생존의 의지가 번뜩였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겨우 살아남은 한 인간의 무의미하고도 숭고한 투쟁은 그렇게 계속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