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적한 주택가, 낡았지만 아늑한 6층짜리 아파트. 그 중 404호에 사는 지민은 프리랜서 웹툰 어시스턴트였다. 그녀의 세상은 작업실이자 침실인 방 안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디지털 태블릿의 익숙한 빛, 따뜻한 커피 한 잔, 그리고 배경처럼 흐르는 재즈 음악. 그것이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지민은 평소처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엌으로 향해 물을 끓이고 좋아하는 머그컵을 찾았다. 하지만 평소 컵걸이에 걸려 있던 그녀의 초록색 머그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싱크대 구석, 늘 쓰지 않던 잼 병 뒤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음? 내가 어제 저기 뒀나?”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해서 착각했겠지. 커피를 마시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가장 아끼는 샤프펜슬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톡,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아, 깜짝이야!”
몸을 숙여 샤프를 주웠다. 다시 연필꽂이에 꽂으려는데, 그 순간 볼펜 하나가 틱, 하고 튀어 올랐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지민은 팔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닫힌 창문, 고요한 방. 아무도 없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연필꽂이를 노려보다가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며칠 밤샘 작업으로 예민해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이상한 일들은 잦아들었다.
어느 날은 분명히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가 식탁 위에 나와 있었다. 다른 날은 욕실 문이 저절로 덜컥,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한밤중에는 주방에서 냄비 뚜껑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가 하면, 거실 스탠드 조명이 혼자 깜빡이곤 했다.
처음에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아파트의 ‘특이성’으로 치부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가 보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헐거워졌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그림 도구들이었다. 지민은 태블릿 옆에 늘 여러 종류의 펜과 스케치북을 놓아두었는데, 밤사이 펜들이 제멋대로 다른 색깔별로 분류되어 있거나, 스케치북 위에 정체불명의 낙서가 그려져 있곤 했다. 낙서라기보다는… 아주 서툰, 아이의 그림 같은 것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그리는 웹툰 캐릭터의 얼굴에 작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누, 누구세요…?”
어느 날 밤, 지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을 향해 중얼거렸다. 스탠드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부엌 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녀는 공포보다는 기묘한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인가?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접시가 날아다니거나 물건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조금, 아주 조금씩 제자리를 벗어나거나, 조금 더 정돈되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장난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결국 지민은 거실 한가운데 의자를 가져다 놓고 밤새도록 기다려보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 녹화 버튼도 눌러두었다. 자정, 새벽 한 시, 두 시… 졸음과 싸우며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였다.
주방 쪽에서 아주 희미한 ‘딸깍’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냉장고 문이었다. 냉장고 문이 아주 천천히, 마치 누군가 손잡이를 잡고 여는 것처럼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반쯤 남은 초코 푸딩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푸딩은 지민이 앉아 있는 거실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테이블에 착지한 푸딩은 이내 뚜껑이 스르륵 열리고, 안에 꽂혀 있던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이 마치 누군가 움직이는 것처럼 한 스푼 가득 푸딩을 떠서…
그녀의 눈앞, 정확히 1미터쯤 떨어진 허공에 멈춰 섰다.
지민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을 깜빡이자 허공의 숟가락은 이내 스르륵 푸딩 안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냉장고 문은 닫혀 있었고, 푸딩은 원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테이블 위에는 푸딩이 없었다. 대신 어제 밤 그녀가 밤새 먹으려다 깜빡하고 먹지 못한 마카롱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딱 한 입 베어 문 채로.
지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너… 나랑 같이 사는구나?”
그때부터 지민은 그 ‘무언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존재는 그녀의 삶에 아주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지민이 한밤중에 작업을 하다 간식을 찾으면, 가끔 그녀가 좋아하는 과자가 눈앞에 툭, 하고 나타나 있었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다음 날 아침이면 작업실이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곤 했다. 흩어져 있던 펜들은 색깔별로 나란히 꽂혀 있었고, 종이들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심지어 지민이 한창 고민하던 웹툰 캐릭터의 의상에 작은 스케치 하나가 더해져 있기도 했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였다.
“고마워.”
지민은 어느 날 작업실에서 스케치북에 그려진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고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스탠드 조명이 깜빡, 하고 화답하듯 빛났다.
그때부터 지민은 그 존재와 대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무언가 부탁하고 싶을 때면 스케치북에 글로 적어두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 그러면 얼마 후, 마법처럼 따뜻한 찻잔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물론 직접 차를 끓이는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친구가 어딘가에서 찻잎을 우려내어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지민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밤샘 작업을 할 때면 늘 누군가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혼자 그림을 그리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녀의 어시스턴트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성실하고 유쾌한 존재였다.
어느 맑은 오후, 지민은 작업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태블릿에는 새로운 웹툰의 시놉시스가 떠 있었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였고, 그녀의 아파트에는 보이지 않는 친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작은 화병 속 꽃 한 송이가 살랑, 하고 흔들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지민은 빙긋 웃으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고마워. 오늘도 잘 부탁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이었지만, 지민은 분명 그곳에 따뜻한 온기가, 그리고 자신만의 작은 비밀이 존재함을 느꼈다. 도시의 복잡한 아파트 속, 그녀의 일상은 그렇게 아주 특별하고 따뜻한 애니메이션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친구와 함께 만들어가는, 둘만의 평범하지만 기묘한 나날들 속에서, 지민은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 웃음 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