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핏빛 어둠의 속삭임
어둠은 비릿한 피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제국의 거대한 감시탑이 뿜어내는 희미한 빛마저 삼켜버린 밤,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 열 명 남짓한 그림자들이 숨죽여 움직였다. 발밑에 밟히는 돌멩이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긴장감은, 차가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게 했다.
선두에 선 카인은 낡은 가죽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얼굴의 절반을 가린 흉터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의 눈은 칠흑 같은 밤에도 길을 찾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저 멀리, 거대한 철문 뒤로 붉고 음산한 빛이 새어 나왔다. ‘진혼곡 요새’. 제국의 곡창이자, 동시에 역병처럼 퍼지는 소문의 진원지였다.
“엘라, 동쪽 망루는?” 카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배어 있었다.
앞서 달리던 소녀, 엘라가 손가락으로 세 번 두드리는 신호를 보냈다. ‘안전’. 엘라는 평민치고는 이례적으로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정보원이자 궁수였다. 폐허의 잔해 위를 마치 물 흐르듯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녀의 움직임은 한 마리의 그림자 같았다.
“예, 카인님. 망루의 사령병은 처리했습니다. 순찰 주기는 여전하고요. 다만… 어딘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카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엘라가 ‘이상하다’고 할 때는 항상 문제가 뒤따랐다.
“평소보다… 더 조용해요. 바람 소리마저 삼켜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한 비린내가 강해요. 피 냄새 같기도 하고, 썩은 살 냄새 같기도 하고….” 엘라가 코를 찡그렸다. 밤공기를 가르는 그 냄새는 단순히 동물의 것이 아니었다.
뒤따르던 한이 묵직한 대형 망치를 어깨에 둘러메며 불평했다. “쳇, 놈들의 심장도 썩어 문드러졌으니 냄새도 역겹겠지! 대화는 들어가서 해, 어서 움직이자고!”
한은 전직 광부 출신으로, 카인 다음가는 실력을 가진 돌격대장이었다. 단순 무식해 보이지만, 제국 병사들을 수십 명 때려눕힐 힘은 평민들을 하나로 묶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서두르지 마. 제국 놈들은 조용할수록 더러운 수를 쓰는 법이다.” 카인은 낡은 단검을 뽑아 들고 날을 쓸어보았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보급품 탈취가 아니다. 놈들이 데려간 마을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구출하는 것. 그리고… 그 붉은 빛의 근원을 밝혀내는 것이다.”
진혼곡 요새는 제국이 대륙 전체에 설치한 보급창고 중 하나였지만, 최근 몇 달 사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근처 마을의 젊은이들이 실종되고, 밤마다 기괴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는 이야기. 그리고 새벽이 되면 요새 주변으로 붉은 기운이 피어오른다는 끔찍한 이야기들. 카인과 그의 ‘여명의 그림자’ 동료들은 그 소문들이 단순한 미신이 아님을 직감했다.
선두에 선 카인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요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 낡고 녹슨 철문이 보였다. 평소라면 두 명의 사령병이 지키고 있을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이건 함정이다.” 한이 망치를 고쳐 쥐며 중얼거렸다.
“아니, 함정이라면 좀 더 요란하게 꾸몄을 테지.” 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놈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가 스스로 걸어 들어오기를.”
그는 철문 틈새로 시선을 던졌다. 안쪽은 지독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한층 더 강렬하게 폐부를 찔렀다. 카인은 엘라에게 눈짓했다. 엘라가 조용히 단검을 뽑아 들고 문틈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완벽했다. 문고리에 칼날을 꽂아 넣고, 안쪽에서 빗장을 해제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철문이 안쪽에서 스르륵 열렸다.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여름밤의 열기를 단번에 식혔다. 카인은 동료들을 향해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어둠 속에 숨겨진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 벽에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붉은 피로 그려져 있었다. 마르면서 검붉게 변색된 피는 묘한 영기(靈氣)를 내뿜으며 보는 이를 현혹했다. 횃불도 없는 복도는 저 멀리서 새어 나오는 섬뜩한 붉은 빛에 의해 간신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한이 헛구역질을 참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복도 끝,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는 거대한 홀이 있었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열두 개의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기둥들마다 족쇄에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들이 매달려 있었다. 모두 근처 마을에서 실종된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굳어 있었고, 몸은 피를 빼앗겨 메마른 나무껍질 같았다.
“이런… 이런 미친 짓을…!” 엘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분노와 역겨움이 뒤섞인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그 제단 위였다. 제단 위에는 거대한 구(球) 형태의 검은 수정이 놓여 있었고, 그 수정은 족쇄에 묶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를 빨아들이는 듯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정 주변에는 기괴한 의복을 입은 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잿빛이었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검은 태양 교단’의 사제들이었다.
“감히… 감히 제국의 이름을 빌려 이런 짓을…!” 한이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았다.
“신성한 태양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카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단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들의 분노는 타오르는 불길 같았지만, 동시에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공포가 심장을 옥죄어 왔다.
그때, 제단 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던 교단 사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홀 전체를 뒤흔들었고, 붉은 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오라, 어둠의 아이들이여! 너희의 어머니, 태양의 심장이 너희를 부른다! 이 불경한 자들을, 순결한 피로 씻어내고 다시금 우리의 힘을 증명하라!”
사제의 외침이 끝나자, 홀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평범한 제국 병사가 아니었다. 뼈대가 기괴하게 뒤틀리고, 피부는 썩어 문드러진 채 검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괴물들이었다. 눈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불타는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사령병들이었다. 다만 이곳의 사령병들은 차원이 달랐다. 죽은 자의 몸에 악령을 강제로 주입한 듯, 생전의 힘과 잔혹함이 배가 된 듯 보였다.
“사령 기사…! 놈들이 인체 연성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엘라의 목소리가 전율했다. 그녀는 화살을 시위에 걸었지만, 그 압도적인 숫자에 일순간 망설였다.
“흩어져! 놈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마!” 카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령 기사들은 마치 굶주린 늑대 떼처럼 달려들었다. 이성의 흔적조차 없는 그들의 눈빛은 오직 파괴만을 갈구했다. 카인은 단검을 휘두르며 가장 먼저 달려든 사령 기사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놈의 몸에서는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을 뿐, 전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잘린 목에서 검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카인을 휘감으려 했다.
“젠장, 놈들은 죽여도 죽지 않아!” 한이 망치로 사령 기사의 머리를 부숴버렸지만, 놈의 몸뚱이는 여전히 꿈틀거렸다.
엘라가 쏜 화살은 사령 기사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지만, 놈은 그저 잠시 휘청거릴 뿐이었다. 놈들은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끈질기게 달려들었다. 평범한 무기로는 놈들을 영원히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노려! 심장을 파괴해야 한다!” 카인이 외쳤다. 그의 몸은 이미 여러 번의 공격을 피하며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제단 위의 사제는 그들의 필사적인 싸움을 비웃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수정은 더욱 붉게 빛나며 홀 전체를 음산한 기운으로 뒤덮었다. 카인은 문득 깨달았다. 이 수정이 바로 사령 기사들에게 힘을 부여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피가 그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이대로는 안 돼…!” 카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동료들은 하나둘씩 사령 기사들에게 둘러싸이고 있었다. 한이 거대한 망치로 놈들을 밀어붙였지만, 그의 주변으로 벌써 세 마리의 사령 기사가 피 묻은 손톱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엘라의 활시위가 끊어질 듯 울었지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카인은 단검을 고쳐 쥐고, 사령 기사들을 뚫고 제단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눈빛은 핏빛으로 물든 광기마저 품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검은 수정을 파괴하지 않는 한, 이 악몽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곳에 붙잡힌 자들의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의 눈앞에는 이미 수십 마리의 사령 기사들이 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제단 위의 고위 사제가 불쾌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감히 태양신의 심장을 건드리려 하는가? 너의 오만함이, 너의 죽음을 부를 것이다.”
카인은 대답 대신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살아남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걸어야만 했다. 그의 등 뒤에서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카인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가는 듯했지만, 동시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나의 죽음은… 너희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 될 것이다!”
그의 외침과 함께, 카인의 몸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가 잊고 있었던, 혹은 억지로 억눌렀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사령 기사들이 움찔하며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인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그의 피 묻은 단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빛을 잃어가던 그의 영혼이, 마침내 거대한 악과 맞서기 위해 각성하는 핏빛 황혼의 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