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노을이 사그라드는 지평선 너머로 잿빛 먼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한때 하늘을 찌르던 도시의 마천루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속을 헤치며 걷는 발걸음은 힘겨웠다.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옅게 드리운 공기는 금속과 썩어가는 흙냄새가 뒤섞인 역한 비린내를 풍겼다.
“형, 목마르다….”
갈라진 입술로 겨우 내뱉은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내 뒤를 따르던 아린이 주저앉을 듯 비틀거렸다. 고작 열 살 남짓한 작은 몸은 몇 주째 이어지는 방랑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는 등 뒤에 메고 있던 낡은 배낭을 고쳐 메며 한숨을 삼켰다. 물이 바닥난 지는 이미 사흘. 더 이상 버티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조금만 더 버텨, 아린. 저기 폐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분명 뭐라도 있을 거야.”
내 말에 아린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흙먼지로 뒤덮인 주변을 살피고 있었지만, 희망보다는 공포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피난처가 무너진 후부터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무언가가 도시를 집어삼키는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였다.
낡은 상점의 잔해를 넘어 부서진 아치형 입구를 통과했다. 한때는 화려했을 로비는 이제 검게 그을린 벽과 천장 잔해로 가득했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 녹슨 철 파이프를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들로부터 아린을 보호해야 했다.
“여기, 혹시… 예전에 사람들이 살던 곳인가요?”
아린이 낡은 전시대 옆에 널브러진 빛바랜 그림을 가리켰다. 행복하게 웃는 가족의 모습.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평화로운 세상의 흔적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림을 응시했다. 우리의 세계는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이야기지.”
나는 그림을 뒤집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했다. 불필요한 향수는 사치였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물, 식량, 그리고 안전한 잠자리를 찾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건물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실로 이어지는 낡은 철문이 보였다. 녹슨 경첩은 삐걱거리는 비명 소리를 내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기 전, 아린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일렀다.
“혹시 모르니까, 조금 떨어져 있어.”
삐이익—!
철문이 마침내 열리자, 안에서는 더 짙은 어둠과 함께 눅눅한 바람이 불어 나왔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을 비췄다. 흙더미와 폐기물로 뒤덮인 좁은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통로 한가운데, 흙먼지에 반쯤 파묻힌 채로 빛나는 금속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나는 파이프를 고쳐 쥐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금속 조각을 덮은 흙을 걷어내자, 그것은 단순한 금속 조각이 아니었다. 낡았지만 견고해 보이는 손잡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무언가 거대한 문이 숨겨져 있는 듯했다. 단순히 건물 지하가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의 입구처럼 보였다.
“형, 뭔가 이상해요….”
아린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 순간, 지하실 통로 저 안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읍… 흐읍….” 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긁어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즉시 아린을 내 뒤로 숨기고 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쉿. 가만히 있어, 아린.”
어둠 속에서 불규칙한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희미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온몸이 시커먼 균사체로 뒤덮여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잿빛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길게 늘어진 팔 끝에는 날카로운 손톱 대신 썩어 문드러진 나뭇가지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역한 썩은 내와 함께, 그것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균사괴물…!’
도시의 폐허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최악의 재앙 중 하나였다. 이형의 존재들은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자라나며, 남은 생명력을 모두 빨아먹은 뒤 껍데기만 남아 방황하게 만들었다. 총알도 소용없는 단단한 껍질과 기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르륵… 즈르륵….”
균사괴물이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아린을 지키기 위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철 파이프를 휘둘러 녀석의 팔을 후려쳤지만, 마치 마른 나무토막을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만 날 뿐이었다.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고 거대한 손을 뻗어 내 목을 조르려 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균사괴물의 손이 벽을 후려치자, 시멘트 조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파괴력은 엄청났다. 이곳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저 거대한 문이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아린, 저 문을 열어! 빨리!”
아린은 공포에 질린 채 굳어 있었지만, 내 절박한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내가 발견한 손잡이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낡은 손잡이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더 세게! 힘껏 당겨!”
균사괴물이 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파이프를 던져 녀석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휘청거리는 틈을 타서 아린에게로 달려갔다.
“됐다! 열린다, 형!”
아린의 외침과 함께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안쪽으로 기울었다. 그 틈새로 짙은 어둠이 아닌,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문 너머는 더 이상 단순한 지하실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속 복도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들어가, 아린! 빨리!”
나는 아린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균사괴물이 다시 일어서서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문을 막아섰고, 아린이 복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마자 나도 몸을 던졌다. 쿵!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균사괴물의 울부짖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헐떡이며 복도에 주저앉았다. 살았다. 겨우.
“여기는… 대체 어디야?”
아린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푸른빛을 내는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복도 끝에는 거대한 원형 문이 서 있었다. 그 문에는 낡았지만 선명하게 빛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 지하 통로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멸망한 세계의 심연 속에 감춰진, 새로운 시작의 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무사한 아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 알 수 없는 통로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위험일 수도, 혹은… 어쩌면, 우리가 찾던 희망일 수도 있었다.
“가보자, 아린.”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의에 차 있었다. 잿빛 지평선 아래, 우리는 이제 새로운 미지의 문을 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