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화: 차가운 그림자
자정, 창밖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23층 민아의 아파트는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에어컨이 내뱉는 규칙적인 바람 소리만이 텅 빈 거실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민아는 식탁에 앉아 식어버린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불면증 때문인지, 아파트의 모든 소음이 비정상적으로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삑, 삑.
현관문 디지털 도어록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민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시간엔 아무도 올 리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다시 삑, 삑. 이번엔 더 길고 불규칙한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 비밀번호를 계속해서 누르다 틀리는 것처럼.
“누구…세요?” 민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다가갔다. 어두운 복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삑, 삑, 삑. 소리는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기를 반복했다. 민아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비상 연락망을 누를까 망설이던 찰나, 도어록 액정에서 ‘비밀번호 오류’라는 메시지가 번쩍였다.
“뭐야… 이거 고장 났나?” 민아는 애써 침착하려 했다. 최근 들어 이런 자잘한 고장들이 잦았다. 멀쩡하던 전등이 갑자기 깜빡거리거나, 스마트 스피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더듬어 잠금장치를 확인하려던 순간, 안방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렸다. 민아는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방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는데.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누구야… 누가 장난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다 사라졌다.
안방에서 어둠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민아의 눈에는 문틈으로 뭔가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형체가 스쳐 지나갔다. 착각일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거실등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번엔 주방등, 현관등… 모두 먹통이었다. 아파트는 순식간에 암흑 속에 갇혔다. 창밖 도시의 빛만이 희미하게 실내를 비췄다.
어둠 속에서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은 더욱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민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발작적으로 울렸다.
그때, 안방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마치 유리컵이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였다. 민아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안방 문 안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침대 옆 협탁이었다. 그녀의 휴대폰 충전기가 놓여있던 곳.
쿵!
갑자기 거대한 충격음이 아파트 전체를 울렸다. 민아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거실장 위에 놓여있던 도자기 화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튀어 오른 작은 조각 하나가 민아의 뺨을 스쳤다. 따끔거리는 통증보다 더 심한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물리적인 현상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 민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깨진 화병의 파편들이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파편들 사이로, 무언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듯한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너무나 빨라서 착시 현상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방금 화병이 떨어지기 직전에도 똑같은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민아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한여름이었지만,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한겨울의 칼바람 같았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의 온기가 스며들어 있는 듯한, 차가운 생명력이었다.
민아는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밝은 빛이 사방을 비추자, 놀랍게도 모든 전등이 다시 들어왔다. 눈부신 불빛에 민아는 눈을 찌푸렸다.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깨진 화병, 흩어진 잡지들,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리모컨.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방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민아는 홀린 듯 안방으로 향했다. 빛이 돌아온 안방은 아까와 다르게 평온해 보였다. 협탁 위에는 휴대폰 충전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침대 발치에 놓여있던, 그녀가 아끼는 곰인형이 보였다. 그런데 곰인형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검은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응시하는 것 같았다. 마치, 곰인형이 살아있는 것처럼.
그때, 침대 위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스르륵.
민아는 눈을 크게 떴다. 곰인형 옆에 놓여있던 그녀의 일기장이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넘기는 것처럼. 그리고 멈춘 페이지에는 검은색 펜으로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혼자…’
민아는 비명을 삼켰다. 일기장, 그녀만 보는 일기장이었다.
갑자기 방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공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 차가웠다.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희미하게 왜곡된 공간, 투명하지만 무언가에 의해 뒤틀린 공기. 그 한가운데에서 일기장의 다음 페이지가 넘겨졌다.
‘…아니야.’
그리고 그 순간, 민아의 발목을 무언가가 감싸 쥐었다. 차갑고, 축축하고, 마치 끈적이는 거미줄처럼 그녀의 피부에 엉겨 붙는 느낌. 그녀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끔찍한 감각.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녀의 발목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힘은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손이 그녀를 옥죄는 것처럼.
그녀의 눈에 아지랑이처럼 왜곡되던 공간이 더욱 선명해졌다. 투명한 무언가가 그녀를 중심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지만, 주변의 빛을 미묘하게 굴절시키며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가 현실 세계로 비어져 나오는 것처럼.
“흐읍…!” 민아는 숨을 쉬려 했지만, 폐가 압박당하는 듯한 느낌에 고통스러웠다.
그 투명한 존재가 서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 위로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그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심장을 조여왔다. 등 뒤에서는 곰인형이, 그리고 일기장이 놓인 침대 위에서는 계속해서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야…’
민아는 필사적으로 휴대폰을 휘둘렀다. 눈앞의 왜곡된 공간 속에서, 그 투명한 존재가 순간적으로 더 선명해졌다. 검은색의 흐릿한 윤곽, 인간의 형상과는 전혀 다른, 뒤틀리고 비정상적인 형태였다. 그것은 팔다리조차 분명하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차가운 입김이 스치고 지나갔다.
민아는 울부짖었다. 그녀의 비명은 아파트의 벽을 때리고 되돌아와 그녀의 귓가를 갈랐다. 몸부림치는 순간, 발목을 잡고 있던 투명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안방 깊숙한 곳으로, 어둠 속으로.
그녀의 시야가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펼쳐진 일기장 위, 이제 막 쓰여진 듯한 글자였다.
‘우리… 같이 있을 거야.’
그것이 그녀의 의식을 잠식하기 직전, 그녀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오래된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낮은 진동. 그것은 분명 이 아파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