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 학원의 어둠**
하늘과 맞닿은 듯 드높이 솟은 백색 첨탑들은 성자 학원의 위엄을 세상에 공표하는 듯했다. 대륙의 영혼이라 불리는 아스칼론 산맥의 정기가 흐르는 대지에 세워진 학원은 그 이름처럼 고결하고 신성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마법과 영력을 갈고닦는 이들의 성지가 되어온 이곳은, 모든 어린 마법사 지망생들의 꿈이자, 현실의 벽이었다. 입학조차 하늘의 별 따기였고, 졸업은 한 왕국의 재상이 되는 것과 같은 영광으로 여겨졌다.
2학년 이진우는 그 꿈의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늘 어딘가 어색했다. 빼어난 재능을 타고난 천재도 아니었고, 유서 깊은 마법 가문의 후예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재능을 성실함으로 채워 겨우 학원의 문턱을 넘은, 흙수저 마법사 지망생이었다. 그에게 백색 첨탑의 빛은 때로는 눈부신 희망이었지만, 때로는 자신의 초라함을 비추는 잔인한 거울이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진우는 홀로 학원 도서관의 구석진 곳에 처박혀 고대 마법진 해독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 주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였지만, 아무리 머리를 싸매도 진척이 없었다. ‘고대 신성문자…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었단 말인가.’ 한숨을 쉬며 두꺼운 양피지 책장을 넘기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지?”
도서관의 오래된 서고는 늘 곰팡이 냄새와 먼지로 가득했지만, 지금 진우가 손으로 쓸어본 벽의 일부는 유독 서늘했다. 얼핏 보면 고풍스러운 나무 서가처럼 보였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미세한 틈은 나무가 아닌, 굳게 닫힌 석문의 감촉이었다. 진우는 호기심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석문의 틈새를 더듬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벽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미약한 영력의 파동을 감지했다.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따뜻하거나 차가운, 혹은 명확한 속성을 지녔을 텐데, 이 영력은 굳이 표현하자면 ‘먹먹함’에 가까웠다.
“이곳은 출입 금지 구역이 아니었는데…” 진우는 중얼거렸다. 학원의 모든 비밀스러운 통로와 금지 구역은 이미 1학년 때부터 선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공유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석문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진우는 주변을 살폈다. 늦은 시간이라 도서관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사서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불쑥 용기가 솟아올랐다. 어쩌면 전설 속에 숨겨진 고대 마법사의 유물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아무도 모르는 마법 자료라도?
그는 숨을 고르고, 석문에 손을 짚었다. “개방(開)!.”
아주 작은 영력을 불어넣자, 오래된 석문은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 갔다.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삼켜버릴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이었다. 진우는 주저했지만, 이미 호기심의 둑은 무너진 뒤였다.
“루미나스 엣!”
손끝에서 작은 빛 구슬이 생성되어 어둠 속을 밝혔다. 빛이 닿은 곳은 좁고 긴 복도였다. 복도의 벽은 매끄러운 돌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군데군데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학원 내에서 보던 마법진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원시적이고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문양들이었다. 복도를 따라 내려갈수록 공기는 차갑고 습해졌으며, 흙냄새와 함께 비릿한 쇠 냄새 같은 것이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발걸음 소리만이 어둠 속을 가르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진우는 점점 더 깊이, 학원 지하로 향하는 듯한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복도의 끝에서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빛 구슬이 비추는 시야 안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석실이 드러났다. 중앙에는 낡고 거대한 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쇠문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보였고, 그 위에는 굵고 녹슨 사슬들이 수없이 얽혀 있었다. 그 사슬들은 쇠문을 뚫고 들어가는 듯한 형상으로, 마치 안쪽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뭐지?”
진우는 쇠문에 손을 뻗으려다 흠칫 멈췄다. 쇠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력의 파동은 아까 복도에서 느꼈던 ‘먹먹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마치 억겁의 세월 동안 봉인된 절규와도 같은, 강렬한 고통과 증오의 기운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이익!’
강철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석실 전체를 울렸다. 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쇠문이 아주 미세하게, 마치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밀어내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녹슨 사슬들이, 팽팽하게 당겨진 현처럼 떨리며 끔찍한 비명을 토해냈다.
진우의 눈앞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잔상이 있었다. 거대한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형체,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기시감,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듯한 절망과 공포. 그것은 단 한 순간의 환영이었지만, 진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도망쳐야 해!’
이곳은 그가 알던 성자 학원의 지하가 아니었다. 이곳은, 금지된 무언가가 갇혀 있는 심연이었다.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쳤다. 빛 구슬이 흔들리며 어둠을 가르고, 그의 발소리가 미친 듯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가 석문을 향해 겨우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차갑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는가, 작은 영혼이여.”
목소리는 분명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영혼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혹은 깊은 심해에서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같은, 기괴한 음색이었다. 진우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석실의 어둠 속에서, 쇠문 저편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쇠문의 봉인된 사슬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