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7화: 붉은 그림자 아래
철회된 도시의 침묵은 언제나 세한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한때 번화했던 ‘신 카이론’의 잔해는 이제 거대한 모래바람에 반쯤 잠긴 거인의 무덤이었다. 휘파람처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이 유일한 생명의 흔적인 양 도시를 헤집고 다녔다. 낡은 파워 슈트의 헬멧 속에서 세한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코어-7 기지의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하이드로-코어를 찾기 위한 임무는, 매번 그랬듯이 생사를 오가는 도박이었다.
“세한 님, 목표 지점까지 200미터. 과거 중앙 전력 공급소 건물입니다. 건물 붕괴율 60% 이상, 접근 시 주의하십시오.”
통신기에 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차분하고 정확한 리나는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나마 그들을 지탱하는 이성적인 끈이었다. 세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헬멧 속 디스플레이에 뜨는 지도를 확인했다. 붉은 점으로 표시된 목적지는 희망인 동시에, 미지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제이크, 건물 안정성 스캔 완료했나? 내부 진입 경로 파악해야 해.” 세한이 나지막이 물었다.
“네, 세한 님. 북동쪽 진입로가 가장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이동에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리고… 어쩐지 대기 질량 변화가 감지됩니다. 일반적인 모래바람과는 달라요.” 제이크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제이크는 젊었지만, 기계와 데이터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했다.
“대기 질량 변화?” 세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행성에서는 변칙적인 기후 현상이 드물지 않았지만, 제이크가 이렇게까지 경고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일단 전진한다. 리나, 후방 경계. 제이크, 진입로 재확인하고 주변 센서 민감도 최대로 올려.”
세 사람은 부서진 고가도로 아래를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발밑에는 유리와 금속 파편들이 밟힐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수십 년 전, 인류가 이 행성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들은 카이론-7이 선물하는 무한한 에너지와 자원에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지의 재앙이 행성을 덮쳤고, 남은 것은 폐허와 죽음뿐이었다. 그 재앙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세한 님! 저것 좀 보세요!” 리나의 다급한 목신호가 들렸다.
세한은 리나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색을 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대한 모래폭풍인 줄 알았지만, 이내 그 형체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일반적인 모래폭풍과 달리 그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붉은색은 점차 짙어지며 도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젠장, 저게 뭐야?” 세한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의 슈트 디스플레이에 ‘대기 오염도 급상승’, ‘미확인 성분 감지’, ‘산성 농도 위험 수준’ 등의 경고 문구가 붉게 깜빡였다.
“빠르게 이동해야 합니다! 저 안개, 일반적인 모래가 아니에요! 슈트 외피에 이상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이크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세한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단순히 눈과 입을 막는 모래가 아니었다. 저 붉은 안개는 생체와 기계를 가리지 않고 부식시키는 독성 물질임이 분명했다.
“달려! 전력 공급소 건물까지 최대한 빨리 이동한다! 내부로 진입하면 일단 안개는 피할 수 있을 거야!”
세 사람은 폐허 속을 미친 듯이 달렸다. 붉은 안개는 그들의 등 뒤를 맹렬히 추격했고, 이내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슈트의 외부 센서들이 하나둘 먹통이 되기 시작했다. 헬멧의 투명창 위로 붉은 액체가 흐르는 듯한 흔적이 번졌다.
“으윽! 슈트가… 왼쪽 팔 부분에서 누출 감지! 피부에 닿았어요!” 제이크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세한은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제이크가 위험에 처한 것은 알았지만, 여기서 멈추는 것은 모두의 죽음을 의미했다. “견뎌! 제이크! 조금만 더 버텨!”
마침내 무너진 전력 공급소의 거대한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남은 힘을 쥐어짜 문이 없어진 입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붉은 안개가 그들의 발밑을 덮치는 순간, 세 사람은 간신히 건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쿵!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세한은 곧바로 금속 문을 닫아 걸었다. 낡고 부식된 문은 완전히 밀폐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붉은 안개의 유입을 늦출 수는 있을 터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한의 눈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제이크가 보였다.
“제이크! 괜찮아?!” 리나가 다급하게 제이크에게 달려가 슈트의 손상 부위를 살폈다.
제이크의 슈트 왼쪽 팔 부분은 심하게 부식되어 있었고, 그 틈으로 피부가 붉게 변색된 채 부어오른 모습이 보였다. 제이크는 고통에 신음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젠장… 해독제 가져와! 빨리!” 세한이 명령했다.
리나는 재빨리 응급 키트에서 해독제를 꺼내 제이크의 팔에 주사했다. 그 사이 세한은 주변을 살폈다. 건물 내부는 어둡고 거대한 기계들이 흉물처럼 서 있었다. 목표인 하이드로-코어는 중앙 설비실에 있을 터였다.
“제이크, 이대로는 안 돼. 리나, 제이크를 부축해서 따라와. 우리가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무를 수는 없어.”
“세한 님… 안개 성분을 분석했는데,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정 에너지가 응축된 형태이고, 일반적인 산성비나 독성 가스와는 달라요. 마치… 살아있는 물질 같아요.” 제이크는 고통 속에서도 겨우 정신을 차려 말했다.
살아있는 물질. 세한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재앙 이후, 이 행성에서 발견되는 모든 이상 현상들은 미지의 존재로 인해 벌어진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단순한 루머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제이크의 말은 그 소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하이드로-코어를 찾아서 바로 철수한다. 서둘러!”
그들은 건물 내부의 복잡한 통로를 헤치고 나아갔다. 붉은 안개의 기운이 문틈을 통해 스며들어왔지만, 안으로 진입하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마침내 그들은 중앙 설비실에 도달했다.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들이 즐비한 그곳 중앙에, 푸른빛을 희미하게 내뿜는 하이드로-코어가 보였다.
“찾았다!” 리나가 기뻐서 소리쳤다.
하지만 코어를 둘러싼 구역은 낡은 전선과 부식된 금속 파편들로 가득했다. 불안정하게 매달린 철골 구조물 아래, 코어는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젠장, 저걸 어떻게 가져나와야… 제이크, 괜찮겠어?” 세한은 제이크의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제이크의 얼굴은 창백했고,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기계 다루는 데 익숙하니까요. 저 전선들을 절단하고… 코어를 해체하는 작업은 제가 제일 빨라요.” 제이크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세한은 잠시 망설였다. 제이크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시간은 없었다. 붉은 안개가 언제 건물 내부로 완전히 침투할지 알 수 없었다.
“알겠다. 하지만 무리하지 마. 리나, 제이크를 엄호해. 나는 주변 경계.”
제이크는 낡은 공구 벨트를 꺼내들고 코어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손놀림은 비록 느렸지만, 여전히 정확했다. 낡은 전선들이 끊어지고, 고정 볼트가 풀리는 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때, 갑자기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밖에서 붉은 안개가 건물 외벽을 강타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음이 들려왔다. 천장에서 먼지와 함께 낡은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세한 님! 천장!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리나가 소리쳤다.
제이크는 안간힘을 쓰며 코어를 분리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몸은 경련하는 듯 보였다.
“거의 다 됐다! 서둘러 제이크!” 세한이 외쳤다.
마지막 볼트가 풀리고, 하이드로-코어가 낡은 지지대에서 분리되었다. 제이크는 코어를 품에 안고 힘겹게 몸을 돌렸다.
“가자! 지금이다!”
세 사람은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건물은 붉은 안개의 맹렬한 공격에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이 간신히 닫아놓았던 입구의 금속 문은 이미 반쯤 부식되어 녹아내리고 있었고, 붉은 안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젠장! 뛰엇!”
세한은 남은 힘을 다해 붉은 안개를 뚫고 밖으로 나섰다. 그의 슈트 디스플레이에서는 온갖 경고음이 울렸고, 외피가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마침내 그들은 폐허 저 멀리 대기하고 있던 드롭십까지 도착했다. 리나가 제이크를 부축해 안으로 밀어 넣고, 세한이 마지막으로 탑승했다. 굉음과 함께 드롭십의 해치가 닫히고, 기체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드롭십 안은 붉은 안개로부터는 안전했지만, 제이크의 상태는 더 악화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고, 숨은 몹시 가빴다.
“제이크! 제이크! 정신 차려!” 리나가 그의 뺨을 두드렸다.
세한은 조종석에 앉아 드롭십을 조종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붉은 안개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이상한 형체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안개 자체가 거대한 생물인 양, 도시의 잔해를 파괴하며 맹렬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 안개… 단순한 기후 현상이 아니었어.” 세한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희망과 함께 새로운 위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이 겨우 얻어낸 하이드로-코어가 코어-7 기지를 얼마나 더 지탱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에는 또 어떤 붉은 그림자가 그들을 덮쳐올까.
“세한 님… 저는… 괜찮을 겁니다… 기지까지… 꼭… 돌아가야 해요…” 제이크가 겨우 한마디를 쥐어짜내며, 품속의 하이드로-코어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깜빡였다.
세한은 드롭십의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 그들의 희망은, 이제 저 망가진 행성에서 겨우 탈출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 희망은 바로 살아남는 것, 그리고 저 붉은 그림자의 근원을 밝혀내는 것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제이크를 살려야 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위협으로부터, 남은 이들을 지켜야 했다. 긴 밤은 이제 막 시작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