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심연의 연가 (잊혀진 심연의 戀歌)
**제1장: 심연의 눈동자**
차가운 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발밑은 축축했고, 천장에서는 이름 모를 지하수가 일정치 않은 간격으로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카이는 익숙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길고 가는 검날 끝으로 어둠을 헤집었다. 촛불도 마법 등도 소용없는 곳이었다. 이 ‘잊혀진 심연의 전당’은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오직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감각과 희미한 마력 감지로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아… 또 막다른 길인가.”
나지막한 혼잣말이 깊은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는 장막 속에서도 주변의 윤곽을 더듬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고대 문양으로 빼곡한 벽화들, 그리고 틈새를 비집고 흐르는 검은 액체… 심연의 독액이었다. 섣불리 닿았다간 살이 녹아내릴 것이다. 카이는 한숨을 쉬며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맸다. 벌써 사흘째였다. 전당의 가장 깊숙한 곳,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심장의 방’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그는 평범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대륙 최강이라는 칭호를 듣는 베테랑 던전 브레이커였고, 어떤 마물도 그의 칼날 앞에서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마물은 거의 없었다. 대신 끊임없이 길을 왜곡하고 정신을 혼란시키는 고대의 마력이 전당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마력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탐험가들을 가지고 놀다 서서히 질식시키는 듯했다.
“젠장,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다간 가지고 온 물도 다 떨어지겠군.”
카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막다른 벽이 나타나면, 그는 언제나 그랬듯 고대 마력의 흐름을 읽어냈다. 어딘가에 분명히 길이 있었다. 마력이 옅어지는 곳, 혹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곳. 그것이 심연의 전당이 숨겨놓은 비밀 통로의 힌트였다. 그의 예리한 감각이 왼쪽 벽 깊숙한 곳에서 미세한 균열을 감지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벽을 더듬었다. 차가운 돌덩이 아래,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기운. 망설임 없이 검자루를 잡고 벽을 후려쳤다.
콰아앙!
굳건해 보이던 암벽이 거짓말처럼 부서지며 돌먼지와 함께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에서는 묘한 냄새가 풍겨왔다. 흙냄새도 아니었고, 철 냄새도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 묵은 신비로운 꽃의 잔향 같기도 했고, 동시에 날카로운 쇠비린내 같기도 한, 형언할 수 없는 향기였다.
“이건… 대체.”
카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갈수록 넓어졌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은 점차 옅어졌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카이는 숨을 헙 들이켰다.
그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거대한 돔형 공간이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수정들이 천장과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수정들은 제각기 다른 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은 너무나 영롱하여 마치 우주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했다. 바닥에는 투명한 물이 고여 있었고, 그 수면 위로 수정들의 빛이 반사되어 환상적인 무늬를 그렸다.
그리고 그 모든 빛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중앙에 솟아난 거대한 수정 기둥.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투명한 수정은 그녀의 모든 것을 투영하고 있었다. 길고 은백색의 머리카락은 수정 기둥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의 물에 닿아 있었고, 피부는 눈처럼 희고 섬세했다. 얇은 실크 같은 옷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것은 옷이라기보다 그녀의 일부처럼 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는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굳게 닫힌 눈꺼풀 아래, 마치 우주의 심연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카이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든 손을 내렸다.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숨을 죽였다. 그녀는 살아있는 존재였다.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수천 년, 어쩌면 수만 년을 이곳에 봉인된 채 잠들어 있었을 존재.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리품이나 마물과는 다른,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그는 천천히 수정 기둥으로 다가갔다. 수정에 손을 대자, 차가운 냉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수정 기둥 전체를 감싸고 있던 고대의 마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잠들어 있던 거인이 눈을 비비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냐.”
메아리 없는 목소리.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카이의 뇌리에 직접 울렸다. 수천 년의 고독과 침묵이 담긴 듯한, 그러나 동시에 깊은 슬픔을 품은 음성이었다.
카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당신은… 대체.”
그의 질문에, 여인의 굳게 닫혔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갔다.
수정 기둥을 가득 채웠던 모든 빛이 한순간에 그녀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평범한 눈이 아니었다. 보라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채,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담아놓은 듯한 깊이를 지닌 눈동자. 그 눈동자는 카이를 응시했고, 그 시선은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는 것 같았다. 모든 비밀과 상처, 그리고 숨겨진 욕망까지도.
카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몸을 짓누르는 이 압도적인 존재감은, 그가 지금까지 마주했던 어떤 마물이나 대마법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거대함이었다.
여인의 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침묵의 목소리가 카이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인간…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질문의 의도보다, 오랜 세월 갇혀 있던 존재가 마침내 ‘밖’과 연결되었을 때의 경이로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카이는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히 거짓을 고할 수도 없었고, 진실을 말하기엔 그녀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했다.
“저는… 그저… 이곳의 비밀을 찾으러 왔습니다.” 카이는 겨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무엇이십니까?”
그의 질문에 여인의 눈동자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윽고,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슬픔을 머금은 미소였다.
“나는 이 심연의 전당… 그 심장이다. 오랜 세월 이곳에 갇혀… 너와 같은 존재를 기다려 왔다.”
“저를… 기다려요?” 카이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인의 시선은 카이의 눈을 벗어나 그의 어깨 너머, 어두운 통로를 응시했다. 마치 그 통로 너머에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의 존재는… 세상의 균형을 깨뜨릴 것이다. 너의 종족에게는… 금지된 만남이지.”
금지된 만남.
그 말이 카이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의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충동이 솟아올랐다. 금지되었다는 말에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이끌리는 듯한, 위험하고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그녀의 슬픈 눈동자와 알 수 없는 운명이 그를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너는 이곳에 도달했다. 이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겠지.”
수정 기둥 전체가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의 투명한 물이 잔물결을 일으키고, 수정들이 내뿜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여인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리스. 심연의 정수이자… 너를 시험할 자.”
그녀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수정 기둥을 감싸던 고대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카이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그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전당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수정 기둥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불길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리스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카이를 응시했다. 이번에는 슬픔뿐 아니라, 단호함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선택은… 너의 몫이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격렬한 진동 속에서, 카이는 의식을 잃기 직전, 자신의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지된 존재. 세상의 균형을 깨뜨릴 만남. 그러나 그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붙잡혀 버린 후였다.
모든 것이 빛과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것이 그와 그녀, 그리고 세계의 운명을 뒤흔들 불길한 서곡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