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정의 공명
열두 시를 알리는 자정의 종소리 대신, 낡은 아파트의 벽시계는 삐거덕거리는 태엽 소리를 뱉어냈다. 이한은 모니터 앞에서 길게 하품을 했다. 마감은 사흘 뒤.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내일 당장 닥칠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쌓인 빈 커피잔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그의 책상 위에서 미니 폐허를 이루고 있었다.
“빌어먹을… 소재 고갈인가.”
중얼거림과 함께 펜을 들어 빈 스케치북에 아무렇게나 선을 그었다. 그가 그리는 웹툰은 평범한 회사원들이 외계 문명과 접촉하며 벌어지는 코믹 스페이스 오페라물이었다. 물론, 그의 삶은 웹툰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본 적도, 광선총을 쏴본 적도 없었다. 그저 서울 변두리, 낡은 아파트 503호에서 키보드와 씨름하는 흔한 자취생일 뿐.
삑-
갑자기 책상 스탠드의 불빛이 꺼졌다. 이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스위치를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또 전등 나갔나? 이 빌어먹을 아파트는 멀쩡한 게 없어.’ 투덜거리며 스마트폰 플래시를 켰다. 침침한 불빛 아래, 그는 전구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쿵, 하고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낡은 건물이라 옆집에서 뭘 떨어뜨렸겠거니 생각했지만, 진동은 책상 모서리에 놓인 그의 스케치북을 살짝 움직였다. 종이 두 장이 바닥에 나풀거렸다.
“뭐야.”
이한은 손을 뻗어 스케치북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진동은 멈췄지만, 어쩐지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도시의 소음,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생활 소음…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오후, 이한은 늘 그랬듯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짭짤한 국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는 다시 마감을 위해 모니터를 켜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고독하고 끈기 있는 작업. 그가 유일하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내가 안 닫았나?”
어제 밤샘 작업 때문에 건망증이 심해졌나 싶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제대로 닫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은 굳게 닫혔다.
다시 의자에 앉아 한참을 그림에 몰두했을까. 이번에는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거실 바닥에는, 며칠 전 새로 산 세라믹 머그컵이 산산조각 난 채 널려 있었다. 컵은 분명 거실 테이블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떨어질 리 없는 위치였다.
“……도둑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도둑이 들어와서 멀쩡한 컵이나 깨고 도망갈 리도 만무했다.
이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각들을 치웠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벽시계의 삐걱거리는 소리마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는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낡은 건물이라 진동이 심한 건가? 컵은 그냥 내가 무의식중에 잘못 뒀던가….’
하지만 그 합리적인 설명들은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의 아파트에서는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천장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마치 날카로운 손톱으로 시멘트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위층 소음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히, 그의 방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지고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의 머리맡에서, 스스슥, 스스슥.
소리는 마치, 천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놓인 침대 협탁 위의 유리컵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안에 담긴 물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것처럼, 컵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쳤나….”
이한의 입에서 넋 나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컵은 불과 몇 센티미터 높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마술보다 기이했다. 투명한 물이 출렁이며 마치 작은 파도를 일으키는 듯했다.
그리고 컵은, 마치 투명한 손에 쥐여진 것처럼,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물이 몇 방울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컵은 그대로 다시 협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침묵. 천장의 긁는 소리도, 컵의 진동도 멈췄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알았다. 이건 ‘원래대로’가 아니었다. 이건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가 모르는, 이 세계의 질서를 벗어난 무언가.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플래시를 켜 천장을 비췄다. 어두운 방 안, 플래시 불빛이 닿은 천장 한 귀퉁이에 희미하게 빛나는, 이상한 문양이 보였다.
그것은 손으로 그린 낙서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언어의 문자 같기도 했다. 푸른빛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이한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섬뜩함과 동시에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잊고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느낌.
그것은 그의 웹툰에 나올 법한, 허무맹랑한 우주선 내부의 문양과 흡사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정교하고 복잡한, 그의 상상력으로는 감히 따라 그릴 수 없는 문양이었다.
문득, 그의 왼쪽 손목 안쪽에 새겨진,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는 희미한 검은 반점이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왼손을 들어 손목을 내려다봤다. 불빛 아래, 흑색 반점은 마치, 천장의 푸른 문양에 반응이라도 하듯, 아주 미세하게,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그의 심장이 아니라, 아파트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거대한 울림이 그의 발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플래시 불빛이 휘청거렸고, 천장의 푸른 문양이 일순간 밝게 빛났다. 이한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가 잊고 있던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무수히 빛나는 별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울려 퍼지는, 기계적인 목소리.
“시스템… 활성화 중… 오버로드 임박… 비상 프로토콜….”
현실의 아파트 벽이 삐걱거리고, 모니터 화면이 지지직거렸다. 창밖의 도시 야경은 흔들리는 그의 시야 속에서 일그러졌다. 이한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이, 자신이 믿어왔던 현실이, 지금 이 순간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그의 아파트, 아니, 이 아파트 자체가 어떤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비밀의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