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덮인 세상은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갈라진 대지 위, 지아는 녹슨 철골 구조물 사이를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지나갔다. 햇빛은 희미한 막을 뚫고 간신히 존재를 알릴 뿐, 모든 색은 바래고 희뿌옇게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손에 든 낡은 금속 탐지기는 미약한 신호음을 간헐적으로 내뱉었지만, 그것조차 허망한 메아리 같았다.
“젠장, 또 아무것도 없어.”
혼잣말이 탁한 공기 속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며칠째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빗물 저장통에는 바닥에 고인 흙탕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이미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된 지 오래였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지아가 발견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아지랑이 너머, 옛 도심의 폐허 중에서도 유독 높이 솟은 건물 잔해들이 보였다. 저곳이라면… 혹시나 하는 희망이 실낱처럼 피어났다. 그곳은 다른 생존자들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만큼 위험한 구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지아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폐허의 그림자 속에 당도했다.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거나, 아슬아슬하게 기운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 무덤 같았다. 숨을 헐떡이며 한때 번화했을 거리를 가로질렀다. 유리 파편과 무너진 벽돌 잔해가 발밑에서 서걱거렸다. 그때였다.
*덜컹.*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지아의 온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바람 소리인가? 아니면…
지아는 주저앉아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거렸다. 들려오는 건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그녀는 낡은 배낭에서 녹슨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희미한 빛을 받아 번뜩였다.
“누구… 누구 있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침묵만이 답이었다. 하지만 지아는 확신했다. 누군가 있었다. 이 폐허에 자신 말고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이틀 밤낮을 폐허 속에서 헤매다 지아는 마침내 한 건물을 발견했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건물 외벽은 넝쿨로 뒤덮여 있었고, 부서진 창문은 텅 빈 눈동자처럼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살아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내부로 들어서자 썩은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층계는 어두컴컴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가장 위층까지 올라갔을 때였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이 보였다.
지아는 망설였다. 본능적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 불빛이 주는 희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칼을 고쳐 잡고 문에 귀를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낡은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내부는 뜻밖에도 정돈되어 있었다. 낡은 담요가 깔린 자리, 녹슨 통조림 캔들, 그리고 켜져 있는 작은 기름 램프.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역력했다. 지아는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위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 홀로 이 밤을 지새운다. 그림자들이 창밖을 두드린다. 그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까? 아니,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 나뿐이다.]
지아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글씨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문장은 알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서늘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림자들이 지아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 한쪽 벽에는 누군가가 긁어놓은 듯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그는 여기에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다. 숨어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에게 숨어있다.]
‘그’는 누구지? 쪽지를 읽는 내내 지아의 심장은 더욱 격렬하게 뛰었다. 이 방에 머물던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미쳐버린 걸까?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바깥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불규칙한 박자였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지아는 본능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텅 빈 공간을 가르는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방 안의 램프 불꽃이 흔들리며 꺼져버렸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지아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눈을 감아도 어둠, 떠도 어둠이었다. 발소리는 멎었지만,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는 여기에… 혼자 온 게 아니었어.”
지아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발소리는, 그 그림자는… 자신이 폐허에 들어서면서부터 계속 함께였던 걸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그를 따라온 것인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외부의 소음은 완전히 멎었지만, 지아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빛이 없으니 시간의 개념도 사라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무언가 차가운 것이 손에 닿았다. 거울이었다. 부서진 조각들이 이어 붙여진, 낡은 거울.
지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흙먼지로 뒤덮이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충혈된 눈.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서, 옅은 미소를 띠고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얼굴을 보았다.
“너였구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 눈빛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건 지아의 얼굴이었다. 아니, 지아의 과거의 얼굴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 그녀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나는 너와 함께였어, 항상.”
거울 속의 입술이 움직였다. 지아는 숨을 헐떡였다. 거울 속의 자신은 서서히 변해갔다. 그 얼굴은 이 폐허에서 발견했던 쪽지에 쓰인 불안한 필체처럼 일그러졌다.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였다.
“이제… 네가 나에게 숨어있다.”
거울 속의 지아가 속삭였다. 동시에 지아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그녀는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이 잿빛 세상에서 홀로 버티며, 자신의 그림자에 쫓기고, 자신의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 그녀는 폐허의 다른 생존자를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망가져버린 자신의 정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니… 아니야.”
지아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폐허의 어둠 속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지아는 칼을 들어 거울을 내리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거울은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파편들 속에서 수많은 지아의 얼굴들이 비쳤다. 모두가 불안하게 웃고 있었다.
지아는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었다. 더 이상 칼도, 무기도 중요하지 않았다.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내부에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그녀는 이미 패배하고 있었다.
새벽이 찾아왔다. 잿빛 먼지 너머로 희미하게 동이 트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세상은 어둠 속으로 잠식당했다. 지아는 텅 빈 눈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폐허의 그림자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이제는 그녀의 내면에서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 넓고 황폐한 세상에서, 지아는 여전히 혼자였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거울 속에서 본 또 다른 자신과 함께 이 지옥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진정한 생존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