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피 맺힌 맹세

무한한 푸른 하늘 아래, 웅장한 아틀라스 온라인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고대의 유적들이 폐허로 남아 과거의 영광을 속삭이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음침하고 위험한 장소, ‘환상의 미궁’의 가장 깊은 곳에 우리는 서 있었다.

나는 ‘카이’였다. 그리고 내 옆에는 ‘아크’가 있었다.

“후,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카이, 진짜 고생 많았다.”

아크, 아니 현실에서는 이진우라 불리는 친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활을 고쳐 잡았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그의 눈은 희망과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와 같은 빛이었다. 우리는 숱한 밤을 새우고,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를 넘어서 여기까지 왔다.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진우야. 항상 뒤에서 날 커버해줘서 고마웠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방패를 다시 움켜쥐었다. 내 직업은 ‘수호 기사’. 진우는 ‘그림자 궁수’. 우리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탱킹과 딜링.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아틀라스 온라인 최정상급 길드에서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던 ‘고대 영웅의 증표’를 향해 달려왔다. 이 증표는 게임 내 단 하나뿐인 전설 등급 직업, ‘성기사’의 전직 조건이었다. 누가 전직하든 상관없었다. 우리는 함께 이 증표를 찾아냈고, 함께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었다. 우린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

“자, 이제 저 녀석만 잡으면 돼.”

저 녀석.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뭉쳐 만들어진 듯한 골렘, ‘미궁의 수호자’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은 붉은 섬광을 뿜어냈고, 육중한 주먹이 지면을 내리찍을 때마다 던전 전체가 진동했다.

“진우, 패턴은 아까 브리핑한 대로다. 광역기 오면 내가 막을게. 넌 딜 집중해.”

“알았어, 카이. 믿는다!”

우리는 달려들었다.

수호자의 거대한 주먹이 내 방패에 부딪쳤다. 콰아앙! 온몸이 울리는 충격에도 나는 굳건히 버텼다. 진우가 재빨리 움직이며 수호자의 약점 부위를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화려한 스킬 이펙트와 함께 수호자의 몸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물약은 바닥났고, 스킬 쿨타임은 간당간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호자의 체력은 이제 한 자릿수. 승리는 눈앞이었다.

“진우! 마지막이다! 내 도발에 맞춰서 극딜!”

“간다, 카이!”

내 방패가 수호자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 순간, 진우의 활에서 푸른빛 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화살은 수호자의 심장부에 정확히 박혔고,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승리!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성공했다, 진우야! 우리가 해냈어!”

“그래, 카이! 진짜… 진짜 해냈다고!”

벅차오르는 감격에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수호자의 시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찬란한 빛을 내는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고대 영웅의 증표]
– 등급: 전설
– 설명: 아틀라스 대륙의 첫 번째 성기사, ‘엘드리안’의 용맹이 깃든 증표. 이것을 가진 자는 성기사로 전직할 자격을 얻는다. (단, 대륙에 단 하나만 존재하며, 소유자가 사망 시 드롭될 수 있음.)

나와 진우는 동시에 증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우의 손이 내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어…?”

느닷없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은 나는 휘청거렸다. 동시에 진우의 반대편 손에 들린 단검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퍽!

내 옆구리에 날카로운 고통이 스쳤다.

“크윽!”

믿을 수 없는 통증에 나는 내 캐릭터의 체력바를 확인했다. 순식간에 절반 가까이 줄어든 체력.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진우의 직업은 궁수. 단검을 쓰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이 공격은 명백한 PVP, 즉 플레이어 간 전투였다.

“진우…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내 목소리는 경련했다. 혼란과 배신감, 그리고 차가운 예감이 뒤섞였다.

진우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아까의 기쁨은 흔적도 없었다. 그의 눈에는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 대신, 탐욕과 냉정한 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카이.”

미안하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얼음장 같은 목소리였다. 그는 내게서 손을 떼고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의 손에는 방금 내 옆구리를 찌른 듯한 독이 발린 단검이 들려 있었다. 궁수가 사용할 수 없는, 길드 상위 암살자나 쓰는 그런 단검이었다.

“무슨 소리야… 왜 이러는 건데?”

나는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진우가 왜 내게 칼을 꽂았는지 이해하려 발버둥 쳤지만, 어떤 논리도 찾아낼 수 없었다. 친구가, 가족보다 더 가깝다고 생각했던 진우가 나를 공격했다.

“왜냐고? 뻔하지 않냐.”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성기사는 하나뿐인데, 너랑 나, 둘 중에 누가 가지겠어? 물론 내가 가져야지.”

“너… 너 지금 제정신이냐? 우리가 같이 여기까지 온 건데!”

“같이? 웃기는 소리. 네가 앞에서 몸빵하는 동안 난 뒤에서 네가 혹시라도 증표에 손댈까 감시하는 게 더 힘들었다. 네가 가진 모든 정보, 스킬, 아이템… 전부 내 덕에 얻은 거잖아.”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내 심장을 꿰뚫었다. 내가 그를 믿고 공유했던 모든 전략, 내가 그를 위해 희생했던 모든 아이템, 내가 그를 위해 버텨냈던 모든 위험이 그의 입에서 조롱거리로 변해 있었다.

“이건 내 거야. 네 녀석 같은 어중이떠중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너는 그냥… 내 발판이었을 뿐이야.”

충격에 몸이 굳었다. 그가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독이 발린 칼날은 내 방어구를 가볍게 뚫고 들어왔다. 연이은 공격에 내 체력은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반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검을 휘두르는 저 얼굴이, 너무나도 낯설었기에.

“아직도 멍청하게 서 있네. 역시 카이, 아니 김민준. 넌 끝까지 물러 터졌어.”

진우의 조롱 섞인 말과 함께, 마지막 일격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온몸을 찢는 듯한 고통과 함께 내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나의 캐릭터, 카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고대 영웅의 증표]가 허공에 떠올랐다.

진우는 그 증표를 보란 듯이 집어 들었다.

[이진우 플레이어가 ‘고대 영웅의 증표’를 획득했습니다.]
[이진우 플레이어가 전설 직업 ‘성기사’로 전직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귓가에 울렸다. 내 눈앞에서, 내가 그렇게 염원했던 기회가, 친구의 손에 의해 강탈당했다. 그것도 내가 죽고 나서.

“잘 가라, 카이. 네 덕분에 난 이제 아틀라스 최고의 플레이어가 될 수 있겠네.”

진우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박혔다. 그리고 내 캐릭터는, 무력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경고: 사망했습니다. 모든 아이템을 드롭했습니다.]
[환상의 미궁 내에서 사망하여 부활 시 대량의 경험치와 아이템이 손실됩니다.]
[부활하시겠습니까?]

화면이 점멸하고, 모든 것이 어둠으로 변했다.

***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헤드셋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내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손은 덜덜 떨렸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 게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현실인 양,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진우…”

낮게 읊조린 그 이름에는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게임 캐릭터는 모든 것을 잃고 가장 초보 마을에서 부활했을 것이다. 모든 아이템과 경험치를 잃은 채. 그리고 그는, 진우는, 성기사가 되어 아틀라스의 영웅이 될 것이다.

“내 발판?”

진우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했다. 내가, 그의 발판이었다고? 함께 꿈을 꾸고, 함께 밤을 새우며, 서로의 등을 지켜주었던 그 시간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검은 감정만이 전부였다.

“끝까지 물러 터졌다고? 그래, 이번엔 내가 물러 터졌어. 하지만 다음은 없을 거야.”

내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예전의 순진하고 사람 좋던 김민준이 아니었다.

“이진우. 네가 짓밟은 내 모든 것, 내가 하나도 남김없이 되찾아줄게. 그리고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후회하는 선택을 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나는 다시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복수. 오직 그 하나의 단어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너에게 칼을 꽂아줄 차례다. 가장 깊고, 가장 아프게.

나의 처절한 복수는,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