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밤공기가 낡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강훈은 익숙하게 보일러 온도를 한 칸 올렸다. 703호. 이 도시의 수많은 회색 아파트 중 하나, 그 안에 갇힌 쥐 죽은 듯한 고요함.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서른 중반의 직장인일 뿐인 강훈의 어깨 위로 깊은 피로가 내려앉았다. 그의 삶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지금은 그저 낡은 보고서와 커피 냄새로 점철된 일상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날 밤의 이상한 일은 현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분명히 아침에 신발장 안에 넣어두었던 슬리퍼 한 짝이 현관 정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강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발로 슬리퍼를 밀어 제자리에 넣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깜빡했겠지, 하는 생각에 피곤한 머리를 흔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들었다. 캔 따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거실 탁자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려는 순간, 텔레비전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저절로 켜졌다. 아무것도 송출되지 않는 백색 노이즈 화면이 강훈의 얼굴을 일렁였다.

“젠장, 또야?”

강훈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처음엔 고장인가 싶어 수리 기사를 불렀지만, 기사는 아무 이상 없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다. 그 후로도 간헐적으로 이런 현상이 반복되었다. 그는 리모컨으로 전원을 껐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데,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갑자기 멈췄다. 째깍거리던 시침과 분침이 기이하게 멈춰 선 채로 흔들렸다. 강훈의 시선이 그곳에 박혔다. 평소라면 건전지를 갈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울렸다. 그는 손에 든 맥주 캔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의도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깊은 무의식에 자리 잡은 ‘무감각함’과 ‘예민함’이 공존하는 감각.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화분에서 흙먼지가 푸석, 하고 떨어졌다.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는 실내였다. 흙먼지는 마치 누군가 그 위를 걷기라도 한 것처럼 일직선으로 바닥에 흩어졌다.

“이제는 장난질이 심해졌군.”

강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감각이 서서히 깨어났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읽어내던 시절의 감각.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감이 아닌, 피부 아래 흐르는 기혈이 주변의 미세한 흐름을 감지했다.

아파트 안에는 분명, 어떤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기운과는 달랐다. 죽은 자의 잔영도, 그렇다고 흔한 악귀의 탁함도 아니었다. 기이할 정도로 맑고 투명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차가움과 기이한 끈적거림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마치 오래된 거울 표면에 낀 먼지처럼, 공간의 틈새를 은밀히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훈이 봉인해 두었던 감각을 자극하며, 그의 이성적인 벽을 긁어댔다. 처음엔 사소한 움직임이었다. 책장 위 책의 위치가 미묘하게 바뀌거나, 옷장 문이 조금씩 열려 있는 것 정도. 그 다음엔 물건이 사라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전등이 깜빡이는 현상. 그리고 이제는, 시계가 멈추고 흙먼지가 떨어지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강훈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거실 중앙, 흙먼지가 떨어진 자리에 섰다. 그리고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그의 손끝에, 미세하지만 분명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막, 혹은 투명한 벽과 같았다. 마치 차가운 공기의 덩어리가 손끝을 스치는 듯했지만, 그 감촉은 단순히 온도 차이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듯한 ‘압력’이었다.

“나와라.”

강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사무적인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수십 년간 잊고 지냈던 강인한 기운이 실린 음성이었다.

그러자, 거실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암흑이 강훈을 집어삼켰다. 창밖의 도시 불빛만이 희미하게 방을 밝혔다. 어둠 속에서,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쿵!

갑자기 부엌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접시가 깨지는 소리, 컵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마치 누군가 부엌을 뒤집어엎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강훈은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청각과 촉각에 집중했다. 소리는 혼란스러웠지만, 그 속에서 일관된 흐름을 읽어냈다.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부엌 싱크대를 시작으로, 식탁, 냉장고… 그리고 그 방향은 분명, 강훈이 서 있는 거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겨울밤의 안개처럼, 그 기운은 강훈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의 무릎까지, 허리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심장을 옥죄듯 맴돌았다.

강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동자만이 빛을 잃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공포가 아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찾아온, 묘한 흥분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실의 오래된 문이 삐걱거리며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것은 명확한 형태를 띠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더 짙어진 것 같은, 흐릿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강훈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그동안 703호에서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던 ‘그것’이라는 것을.

그림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강훈을 향해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공간을 짓누르는 듯한 압력을 동반했다. 차가운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강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의 내공이 본능적으로 전신을 감쌌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거실 바닥에 놓여있던 작은 유리 조각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강훈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왔다. 마치 수십 개의 작은 칼날처럼.

강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 것은 오직 눈빛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잊고 지냈던 무인의 기상이 번뜩였다. 그는 피하지 않고, 그저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유리 조각들이 강훈의 눈앞 10센티미터 지점에서 멈춰 섰다. 파르르 떨리던 조각들은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림자가 잠시 움찔하는 듯 보였다.

“이제는 인사를 할 때다.”

강훈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손바닥 안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703호 안, 숨 막히는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강훈은 오랜만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아파트에 찾아온 이 불청객이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 밤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