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화
차가운 우주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 버려진 소행성대 한가운데 떠 있는 은밀한 정거장이었다. 반짝이는 우주 먼지들 사이로, 정거장의 낡은 금속 외벽은 오랜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고요했다. 은하 방위대 사령관 아린 헤르메스는 자신의 소형 탐사선 ‘흐림’의 엔진을 끄며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안내등이 그녀의 착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연합의 추적 시스템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곳. 그녀와 카이얀, 오직 둘만을 위한 우주의 작은 은신처였다.
탐사선의 문이 스르륵 열리자, 익숙한 적막함과 함께 싸늘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아린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영롱한 빛이 뻗어 나왔다. 빛의 근원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카이얀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치 별의 파편으로 빚어진 듯한 그의 피부는 푸른색과 은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흡수하고 뿜어내는 듯 반짝였다. 투명한 유리알 같은 그의 눈동자에는 수억 광년의 우주가 담겨 있는 듯 깊고 아득했다.
“아린.”
그의 목소리는 파동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그녀의 심장을 직접 울렸다. 언어가 아니라 감각으로 전해지는 듯한 음성. 엘도라 족 특유의 공명음은 항상 아린의 전신을 전율시켰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고,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갑고도 따뜻한, 이해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턱선을 스치자, 아린은 숨을 들이켰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연합의 규율과 명예에 묶인 사령관이 아니었다. 그저 금지된 사랑에 매달리는 한 여자일 뿐이었다.
“카이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매번 마주할 때마다 처음처럼 낯설고, 처음처럼 뜨거웠다. 그녀의 눈빛은 우려와 갈망으로 번들거렸다. 최근 연합과 엘도라 족 간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외교적 마찰은 무력 충돌의 위기까지 치달았고, 아린은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카이얀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녀의 불안감을 읽은 듯했다. 엘도라 족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때로는 그들에게 저주가 되기도 했다.
“숨길 수 없을 거야, 아린.” 카이얀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의 불안이 나에게도 전해져.”
아린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비상 회의가 있었어. 상부는 엘도라 족 거주 행성 주변에 경계 병력을 증강시키고, 너희들의 에너지 파동 패턴을 심층 분석하라는 명령을 내렸어. 일급 기밀… 나는 그 분석 팀에 합류해야 해.”
그녀의 말에 카이얀의 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미묘한 에너지 파동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아린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종족에게는 이것이 분노, 혹은 슬픔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카이얀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속 공명음이 희미하게 떨렸다. “침략의 사전 준비나 다름없어. 우리의 거주 행성은… 연합의 기술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우주의 에너지 코어와 연결되어 있어. 너희가 말하는 ‘파동 패턴’은 우리의 존재 방식 그 자체야. 그것을 분석하려 한다는 건, 우리를 해부하려는 것과 같아.”
아린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들의 무지함과 오만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합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카이얀과 그의 종족인 엘도라 족은 그들의 이해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알아. 그래서 더 괴로워.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을 거야.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아.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지 않도록 내가 막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볼게.”
“아린, 너는… 연합의 사령관이야.” 카이얀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는 그들의 칼날이 될 수밖에 없어. 너의 손으로 우리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럴 리 없어!” 아린이 소리쳤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나는 너를, 너희를 해치지 않아.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를 배신할 수 있겠어?”
카이얀은 그녀의 양 뺨을 붙잡고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다시 깊고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아린은 그의 절망을 읽었다.
“배신은 너의 선택이 아니야, 아린. 그것은 너에게 주어진 역할일 뿐이지. 그리고 나는… 너의 역할이 너를 집어삼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이 아린의 심장을 칼날처럼 꿰뚫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연합의 충실한 전사이자, 엘도라 족의 존재를 위협하는 선봉장. 그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잔혹한 운명에 갇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연합을 등질 수는 없어. 내 가족, 내 동료들… 그들을 배신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너를… 너희를 외면할 수도 없어. 카이얀, 제발… 답을 줘.”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이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이얀은 그녀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아득해지는 듯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아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거장 외부에서 윙-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시스템 이상 경보였다. 순간적으로 정거장의 내부 조명이 깜빡였다.
“무슨 일이지? 여긴 외부 노출이 불가능한 곳인데.” 아린이 당황해서 말했다. 그녀의 직감이 불길한 예감을 속삭였다.
카이얀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정거장 외부의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우리 말고도… 이 고요한 공간을 탐색하는 이가 있었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거장 외부에서 콰앙! 하는 굉음이 울렸다. 정거장 전체가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작은 은신처가, 지금 거대한 우주의 폭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들켰어…” 아린의 입에서 절망적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카이얀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서 강렬한 푸른빛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도망쳐야 해, 아린. 내가 시간을 벌게.”
“안 돼! 너 혼자 둘 순 없어!” 아린이 그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에너지가 그녀를 정거장 한쪽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곳은 비상 탈출용 포드가 숨겨져 있는 곳이었다.
외부의 충격은 더욱 거세졌다. 정거장의 벽면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파편이 튀었다. 카이얀은 빛나는 손을 뻗어 정거장의 에너지 코어를 향해 힘을 집중했다. 그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아린. 어떤 시련이 와도, 너를 포기하지 않아.”
그의 절박한 목소리가 아린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강렬한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동시에 비상 포드의 문이 열리며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이얀! 안 돼! 제발…!”
아린의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비상 포드의 문은 닫히고 격렬한 엔진음과 함께 어둠 속으로 튕겨져 나갔다. 홀로 남은 카이얀은 정거장의 잔해 속에서 더욱 강렬한 에너지 빛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최후의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별빛처럼 폭발할 듯 빛났다. 아린은 멀어져 가는 포드의 창밖으로 그 빛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사랑하는 이의 장렬한 마지막 모습이 될지도 모르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