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그림자를 드리운 세계, 한때는 마법과 지식의 정점이라 불리던 아르카나 마법학원은 이제 피 묻은 비명과 썩어가는 살 냄새로 가득한 고립된 요새가 되어 있었다. 학원 외벽을 둘러싼 고대 마법 장벽은 간신히 도시를 휩쓴 역병의 파도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안식처라기엔 그 안도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유나는 닳아빠진 마법봉을 꽉 쥐고 학원 중앙 홀의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매일 밤 들려오는 외부의 끔찍한 울부짖음보다, 학원 내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천장이 높은 홀은 한때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마법을 연마하던 활기 넘치는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살아남은 서른 명 남짓한 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웅크리고 있는 황량한 대피소에 불과했다.
“오늘은 누구 차례야?” 서진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는 언제나 날카로운 눈매와 붉은색 마법진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다니는, 학년 수석다운 강단 있는 학생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신과 피로가 섞여 있었다.
“아, 오늘은… 미나 언니랑 현우 오빠래.” 유나가 침음성을 흘리며 대답했다. 미나는 유나의 동기였고, 현우는 유나를 늘 살갑게 챙겨주던 선배였다.
“지하 연구동 봉쇄 점검이라지?” 서진이 비웃듯이 말했다. “그럴듯한 명분이야.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매번 자원자가 나오지.”
유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하 연구동 봉쇄 점검’. 그것은 학원에서 생존자들이 겪는 가장 끔찍한 ‘의무’였다. 한 번 내려가면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했고, 돌아온다 해도 이전과는 다른,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유 모를 병으로 쓰러져 격리되곤 했다. 격리된 이들은 결국 ‘처리’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홀 저편에서, 연로한 강 교수가 무거운 표정으로 미나와 현우에게 작은 마법 등불을 건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 교수님은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유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서진이 팔짱을 끼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숨기는 게 아니라, 감추는 거겠지. 이 학원이 자랑하는 ‘명예’와 ‘지식’ 뒤에 가려진 더러운 비밀 말이야.”
그녀의 시선은 학원 중앙에 우뚝 솟은 마법의 탑, 그 아래로 향하는 거대한 철문, 바로 지하 연구동으로 향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예상대로 미나와 현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홀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유나는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미나가 남기고 간, 품 속에 꼭 숨겨두었던 작은 책갈피를 만지작거렸다. 거기엔 미나의 필체로 ‘A-7 구역, 조심해’라고 쓰여 있었다.
그날 밤, 유나는 서진을 찾아갔다.
“선배, 저 지하로 내려갈 거예요.”
서진은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리석은 짓이야. 알잖아, 한 번 내려가면….”
“알아요. 하지만 미나 언니는 절 위해 단서를 남겼어요. ‘A-7 구역’. 그곳에 뭔가 있을 거예요.” 유나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서진은 한참 동안 유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혼자 가면 죽을 거야. 내가 널 따라갈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도 않네. 망할.”
결국 그들은 함께였다. 지하 연구동으로 내려가는 철문은 낡은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느리게 열렸다. 축축한 공기,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좁고 어두운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과 마법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법 등불의 빛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여기 좀 봐.” 서진이 멈춰 서서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끔찍하게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마치 손톱으로 필사적으로 파낸 듯한 흔적이었다. “누군가 탈출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면… 갇혀 있던 것이 빠져나오려고 했거나.”
유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깊숙이 내려갈수록 온도는 더욱 낮아졌고, 섬뜩한 정적이 그들을 짓눌렀다. 이따금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이 유나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수많은 통로를 지나 마침내 ‘A-7’이라고 새겨진 육중한 철문을 발견했다. 문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지만, 서진은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잠금을 해제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더 강렬하고 역겨운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복잡한 마법 기구들이 늘어서 있었고, 투명한 마법 수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봉인 용기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형체가 뒤틀리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잔해, 마법으로 강화된 듯한 흉측한 팔다리가 뒤죽박죽 엉겨 붙어 있는 괴물, 심지어는 반쯤만 인간인 채로 변이된 생명체까지. 그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지만, 봉인 용기 안에서 미약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살아있는 악몽 그 자체였다.
“이게… 대체 뭐야?” 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건… 이건 우리가 밖에서 마주한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아니야. 이건… ‘제작된’ 괴물들이야.”
그때, 실험실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그들은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문을 열자, 그곳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통로 끝에는 넓은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강렬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마법진 위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발버둥 치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가 있었다. 인간, 마법 생물,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모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명력이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등지고 선 채, 강 교수가 홀로 마법진 앞에서 고대 문자가 새겨진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강 교수님!” 유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강 교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얼굴에는 광기와 피로가 뒤섞인 섬뜩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오, 서진 양과 유나 양이로군. 결국 여기까지 오셨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 모든 게… 교수님이 한 짓입니까? 밖에 있는 괴물들이… 전부 여기서 만들어진 건가요?” 서진이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강 교수는 피식 웃었다. “만들었다니, 천만에. 우리는 ‘완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학원은 수백 년 동안 ‘영혼의 근원’을 연구해 왔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궁극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 역병? 이것은 단지… 예상치 못한 부산물일 뿐.”
그의 손짓에 마법진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묶여 있던 희생자들의 몸이 푸른빛을 띠며 스러져갔다.
“밖의 것들은 불완전해. 하지만 이곳에서 정제된 생명력과 혼을 사용하면, 우리는 진정한 불멸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완벽한 존재들을!”
“미쳤어…!” 유나가 경악했다.
“그래, 미쳤지. 하지만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는 기꺼이 미쳐야 하는 법. 너희도 곧 알게 될 거야. 이 학원이, 그리고 너희가 얼마나 위대한 일의 일부분이 될지.”
강 교수의 눈빛은 섬뜩하게 번득였다. 그의 주변에서 검은 연기가 점점 더 짙어지더니, 뼈가 튀어나오고 살점이 흐물거리는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이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강 교수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방금 전 실험실에서 보았던, 더욱 강력하고 흉측한 변이체들이었다.
“이건… 학원의 금기였어. 영혼을 가지고 노는 마법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고!” 서진이 마법봉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금기? 그건 약자들의 변명일 뿐! 진정한 힘은 금기를 깨부수는 자에게 허락되는 법!” 강 교수가 비웃었다.
거대한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더욱 강력해졌다. 지하 연구동은 더 이상 ‘봉쇄된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학원 전체를 잠식하려는, 살아있는 지옥의 심장이었다. 유나와 서진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함께, 이 끔찍한 진실을 막아야 한다는 필사적인 결의가 서려 있었다. 밖의 좀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학원 지하에 숨겨진 진정한 재앙이 이제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이 위대한 지식의 전당이 사실은 세상의 종말을 계획하던 심연이었다니.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