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숲은 태초의 숨결을 머금고 있었다. 낡은 오두막 창문 너머로 뻗은 거대한 나뭇가지들은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사이로 희미한 달빛만이 겨우 길을 잃은 채 비집고 들어왔다. 윤서는 차가운 나무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며칠째 잠을 설친 탓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눈앞의 오래된 지도에는 붉은색 펜으로 알 수 없는 기호와 좌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수천 년 전 잊힌 존재들의 흔적, 즉 그들의 숨겨진 거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의 한가운데에는, 그녀의 심장을 송두리째 뒤흔든 남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카인…”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목구멍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와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저주였을까. 그를 만나고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논리와 이성이 허물어졌다. 존재해서는 안 될 아름다움, 설명할 수 없는 힘, 그리고 인간의 것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고독과 슬픔을 그는 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였다. 종(種)을 초월한 끌림은 달콤한 독과 같았다.
갑자기 숲에서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날개를 퍼덕이며 어둠을 가르는 듯한 소리였다. 윤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지만,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숲의 숨결이, 이전과는 다르게 무겁고 거칠었다.
“하아, 하아…”
어깨를 감싸 안으며 심호흡을 했다. 이건 단순한 불안감이 아니었다. 지난밤, 카인이 그녀의 오두막을 찾아왔을 때,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는 경고와 절박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 놈들이 움직이고 있어.’*
*윤서가 물었다. ‘놈들? 대체 누가…?’*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피부에 닿자마자 미묘한 열기가 번졌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너를 노리고 있어.’*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나를… 왜?’*
*그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나를 알고…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때의 대화가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카인은 그녀에게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해줄 수 없었다. 아니, 해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그들의 위험한 세계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그녀는 깊숙이 발을 담근 상태였다. 그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이 오두막 문을 강타했다. 윤서는 몸을 움찔 떨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창백한 얼굴로 문을 노려봤다. 낡은 나무 문이 통째로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
날카로운 외침이 숲을 갈랐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비명처럼 처절했다. 카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늘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에는 숨김없는 공포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성을 찾으려 애쓰며 윤서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움켜쥐었다. 학자로서 살아온 그녀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였다. 하지만 그를 만난 후, 그녀의 세계는 끊임없이 깨어지고 재구성되고 있었다.
“윤서! 문을 열어! 빨리!”
다급한 목소리에 뒤이어, 무언가 거대한 것이 문을 들이받는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문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설였다. 문을 열면 위험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저토록 절박하게 외치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카인…!”
그녀가 망설이는 찰나, 숲의 고요를 찢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짐승의 울부짖음. 이 모든 소리가 마치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잔혹한 연극처럼 뒤섞여 그녀의 귀를 때렸다.
윤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카인이 피투성이인 채로 문간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숲의 어둠 속에서 붉고 섬뜩한 눈빛들이 점점이 박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그림자였지만, 분명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냄새는 쇠 비린내와 썩은 흙냄새가 뒤섞인, 끔찍한 악취를 풍겼다.
“카인!”
윤서는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갔다. 그의 몸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진동했다. 카인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의 다리는 힘없이 풀렸다. 그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윤서를 올려다봤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제 핏자국과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도망쳐… 윤서…”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에는 이제 더 이상 평소의 강철 같은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안 돼! 내가 어떻게…!”
윤서는 그의 상처를 보았다. 등과 옆구리에는 깊은 자상이 선명했고, 검붉은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인간이라면 이미 혼절했을 깊이의 상처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오직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놈들이 널… 찾고 있어… 넌 그들의 표적이야…” 카인은 흐릿한 눈으로 숲의 그림자들을 노려봤다. “내… 내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열쇠라고…!”
그의 말에 윤서의 머릿속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연구했던 고대 기록들. 금지된 종족의 부활과 그 열쇠에 대한 암시들. 설마, 설마 자신이 그 열쇠란 말인가? 그녀가 카인과의 연결고리 때문에,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빌미가 된다는 것인가?
숲의 그림자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윤서와 카인을 포위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카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 윤서를 품에 안았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그녀의 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내가… 널 지킬 거야… 약속해…”
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그 순간, 오두막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숲의 그림자들은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윤서는 그의 품에서 떨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어둠 속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괴물들과,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파괴하려는 존재들과 맞서야 했다.
그녀는 카인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차라리 그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리라.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투지와 함께, 기묘한 결의가 타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괴물들의 붉은 눈들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이 사랑은 금지되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어떤 존재든,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녀는 카인을 지킬 것이다. 아니, 그와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그때, 카인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피로 물든 그의 상처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고, 그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그의 눈동자도 푸른색으로 변하며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거대한 힘이, 그의 몸 안에서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괴물들이 주춤했다. 그들의 붉은 눈빛이 공포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 빛은 윤서의 눈에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카인, 그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그리고 그가 품고 있던 이 힘은 대체…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 밤이 끝나면, 그들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이 위험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거나, 산산이 부서지거나, 둘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크아아악!”
카인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오두막 안의 모든 것이 그의 힘에 의해 흔들리는 듯했다.
윤서는 숨을 들이켰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서는 진짜 싸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