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어둠에 잠겼다가 이내 찬란한 빛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띠링! 귓가에 익숙한 기계음이 울리며 `엘데리아에 접속하셨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시야 한구석에 작게 떠올랐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 멀리서 들려오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이 온몸을 감쌌다. 완벽하게 구현된 가상 현실은 언제나 경이로웠다.
“젠장, 또야?”
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늘 그렇듯 고달픈 일상의 연속이었다. 오늘 그가 할 일은 아그네스 마을 변두리에 자리한 작은 밭에서 ‘뿌리열매’를 캐내는 일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곡괭이를 휘두르자 흙먼지가 풀썩이며 올라왔다. 삽날에 걸려 뽑혀 나오는 붉은 뿌리열매는 이곳 아그네스 마을 사람들의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진] 레벨: 5`
`직업: 초급 일꾼`
`체력: 32/40`
`기력: 28/35`
상태창은 늘 잔혹할 정도로 현실을 반영했다. 낮디낮은 레벨, 보잘것없는 직업, 그리고 몇 번 곡괴이질만으로도 쭉쭉 떨어지는 체력과 기력. 그는 엘데리아라는 드넓은 세계에서 그저 이름 없는 평민 플레이어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진아, 좀 더 서둘러야 할 게다. 해가 저물기 전에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옆에서 함께 흙을 파던 늙은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머니의 등은 이미 심하게 굽어 있었고, 앙상한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시 곡괭이를 내리찍었다. ‘크로노스 제국’의 가혹한 징수는 평민들의 삶을 쥐어짜는 해묵은 악습이었다. 매년 거둬가는 황제세, 변경 경비 명목의 군량세, 심지어는 ‘햇살세’라는 같잖은 명목까지 붙여 착취했다. 조금이라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오후가 깊어지고 진의 바구니에는 간신히 허락된 양의 뿌리열매가 채워졌다. 지독한 노동의 대가는 언제나 그랬듯 턱없이 부족했다. 마을 어귀로 돌아가자 늙은 촌장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마을의 모든 이목이 한곳으로 쏠렸다. 이내 번쩍이는 크롬 갑옷을 입은 제국 병사들이 말을 타고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열 명 남짓한 기마병들이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마을을 집어삼킬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
“모두 멈춰라!”
선두에 선 병사가 육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은 쇠붙이가 부딪히는 듯한 차가운 소리를 냈다. 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공포가 그림자처럼 마을을 뒤덮었다. 진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상태창 한구석에 `분노 수치 상승!`이라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촌장, 나와라.”
병사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촌장을 불렀다. 촌장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병사 앞으로 나섰다.
“별일 없으시길 바랍니다, 제국 기사님.”
촌장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별일? 물론 없어야지. 하지만 내 눈에는 좀 있어 보이는데?”
병사는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마을 한쪽에 쌓여있는 뿌리열매더미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간신히 비축해둔 마지막 식량이었다.
“저것은 뭐냐? 황제 폐하를 위한 공물인가? 아니면 제국군을 위한 군량인가?”
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것은 저희 마을의 겨울 양식입니다. 이미 이번 달 황제세와 군량세는 모두 바쳤습니다.”
“바쳤다고? 웃기는 소리! 우리 크로노스 제국의 병사들이 언제든 배불리 먹어야 황제 폐하께서도 평안하신 법. 저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병사는 거침없이 명령했다.
“모든 식량을 회수하라! 그리고 이들에게 경고해라. 다음번에도 이딴 하찮은 것으로 황제 폐하의 권위를 모독하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이, 이보시오! 그걸 다 가져가면 저희는 겨울을 어떻게 나란 말이오!”
참다못한 한 노인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 노인은 진의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였다. 순간 병사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뭐? 감히 대들어?”
병사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노인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은 휘청거리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게 감히 누구에게 대드는 것이냐! 미천한 평민 주제에!”
병사는 쓰러진 노인의 가슴팍을 발로 짓밟았다. 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병사의 목을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레벨은 고작 5였고, 직업은 초급 일꾼이었다. 저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다.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국 병사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뿌리열매더미를 마차에 싣기 시작했다. 묵묵히, 그리고 무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깊은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봤느냐, 진아?”
진의 옆에 있던 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침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크로노스 제국은 우리를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밟고 지나가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일 뿐이야.”
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정말,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까?”
촌장은 먼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멀리 보이는 제국의 성벽을 향하고 있었다.
“힘없는 평민이 뭘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기억해라, 진. 밟힌 풀도 다시 일어서는 법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진은 촌장의 말뜻을 곱씹었다. 마차에 모든 뿌리열매를 실은 제국 병사들이 다시 말을 돌려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남긴 것은 흙먼지와 절망뿐이었다. 진은 멀어져 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마을 사람들의 절망에 찬 얼굴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그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불씨였지만, 언젠가 거대한 불꽃으로 타오를지도 모르는, 작지만 강렬한 반항의 불씨였다. 진은 다시 상태창을 띄웠다.
`[진] 레벨: 5`
`직업: 초급 일꾼`
`능력치: 힘(8), 민첩(6), 지능(4), 정신(5), 운(3)`
`보유 스킬: 삽질 (숙련도: 초급)`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능력치였다. 거대한 제국에 비하면 먼지 한 톨만도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문득 결심했다. 이 게임이 그저 가상현실 게임일지라도, 이곳에서만큼은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삶은 이제 끝이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엘데리아의 아그네스 마을. 진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작은 어깨 위로, 거대한 제국에 맞서는 미약한 평민들의 반란이라는 무거운 숙명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