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새벽은 언제나 불안한 침묵을 몰고 왔다. 잿빛 하늘은 희미하게 여명을 머금었지만, 그 빛은 폐허가 된 도시를 온전히 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녹슨 철근이 뼈대처럼 드러난 고층 빌딩들, 깨진 유리창 너머로 검은 그림자만 가득한 건물들 사이에서, 나는 한 마리 쥐처럼 몸을 웅크린 채 움직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허름한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은 어제 얻은 몇 안 되는 식량과 최소한의 생존 도구로 묵직했다. 흙먼지로 뒤덮인 신발이 콘크리트 잔해 위를 스칠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났다. 이 세상은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미지의 위협들, 그리고 더 위험한 동족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오늘 목표는 저 너머, 반쯤 무너진 구청 건물이었다. 소문으로는 그곳 지하에 오래된 서버실이 있었고, 아직 전력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헛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탐사를 결정했다. 어쩌면 쓸만한 장비나, 혹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대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건물 입구는 이미 온갖 잔해로 막혀 있었다. 나는 숙련된 움직임으로 무너진 기둥과 부서진 벽돌 더미 사이를 기어 통과했다. 내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먼지가 춤을 추듯 떠올랐다. 코를 찌르는 곰팡내와 퀴퀴한 흙먼지 냄새가 역했다.
“젠장, 여기가 맞나….”
혼잣말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거칠게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사람의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인지,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통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거대한 균열이 벽을 타고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더욱 어둡고 절망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듯한 바람 소리, 어딘가에서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긁는 듯한 소리.
나는 순간 멈춰 섰다. 배낭에서 녹슨 칼을 뽑아들었다. 날은 무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누구냐?” 목소리가 다시 거칠게 튀어나왔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예민해져서 착각한 걸까? 아니면… 놈들이 숨을 죽인 걸까?
몇 분간 침묵 속에서 기다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이 정도 불안감은 일상이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드디어 지하로 향하는 낡은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난간은 이미 부식되어 형체만 남았고, 계단 폭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손전등 빛이 계단 아래 어둠을 훑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심연. 공포가 목을 조여 왔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며칠 더 굶주린 채 버티느니, 차라리 여기서 모든 걸 걸고 싶었다.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발소리가 울림통처럼 퍼져나갔다. 이 지하 세계는 지상보다 더 음산하고 냉랭했다.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시멘트 바닥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문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 사이, 거의 알아볼 수 없게 긁힌 자국들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필사적으로 새긴 듯한 흔적들.
나는 손전등을 가까이 대고 그 흔적들을 살폈다. 글자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이곳은… 무덤이… 아니다…”
무덤이 아니라고? 그럼 뭐지?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문 안에 뭐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묘한 이끌림에 홀린 듯, 철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뻑뻑한 마찰음과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은 예상보다 넓은 공간이었다. 케이블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낡은 장비들이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흡사 버려진 연구실 같았다. 나는 손전등을 휘둘러 내부를 살폈다. 그리고 벽 한쪽에 붙어있는 거대한 디스플레이 패널을 발견했다. 먼지투성이였지만,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젠장, 전기가…?”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패널 옆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희미한 불꽃이 튀면서, 패널 전체에 녹색 불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안정된 빛을 내뿜으며 낡은 인터페이스가 부팅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폐허 속에서 전력이 들어오는 곳이 있다니.
나는 조심스럽게 패널에 손을 댔다. 터치스크린이었다. 먼지를 닦아내자, 여러 개의 메뉴들이 나타났다. ‘데이터 로그’, ‘시스템 상태’, ‘비상 프로토콜’. 나는 주저 없이 ‘데이터 로그’를 선택했다.
화면이 바뀌고, 수많은 파일 목록이 나타났다. 대부분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맨 위에는 ‘접근 가능’이라는 표시가 붙은 파일이 있었다. 붉은색 글씨로 ‘긴급 기록 – 프로젝트 [망각]’이라고 쓰여 있었다.
망각?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망각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피어났다. 나는 마우스를 클릭하듯 손가락으로 파일을 눌렀다.
화면이 검게 변하고, 이내 음성 파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낡은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떨리고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기록… 일곱 번째. 바깥 상황은… 더 이상 통제 불능이다. [정화]는 실패했다. 오히려… 더 확산되고 있어. 우리는 실수했다. 우리의 오만함이 이 세상을… 파괴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정화? 그게 뭐지? 그리고 확산?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내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외부와의 연결은 완전히 끊겼다. 여기 남은 우리 인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생존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최후의 데이터를 지켜야 한다. [핵심]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코드명: 그림자]를… 쫓아야 한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기록을 듣는 자는… 부디… [위치 정보: █████████]로 향하라. 그곳에 모든 진실이…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마지막 부분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갑자기 ‘삐—’하는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화면이 깜빡였다.
시스템이 경고 메시지를 띄웠다.
‘외부 침입 감지. 비상 프로토콜 작동 시작.’
외부 침입? 여기?
나는 공포에 질려 뒤를 돌아봤다. 철문은 내가 들어왔을 때보다 더 크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나를 향해 번뜩였다. 짐승의 눈이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그것은, 내가 들어올 때 들었던 그 긁는 소리의 주인이 분명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칼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놈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놈은, 긴 발톱을 세워 나를 향해 돌진했다.
“젠장!”
나는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고, 피부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놈은 흡사 인간과 짐승의 중간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사지, 삐쩍 마른 몸, 그리고 이빨이 돋아난 끔찍한 주둥이. 분명히 ‘그림자 사냥꾼’이라고 불리던, 돌연변이였다. 이 도시가 죽음으로 변한 이후, 어둠 속에 숨어 지내던 놈들이었다.
놈은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이 좁은 공간을 지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놈은 나의 생존본능을 자극하며, 마치 사냥감을 조롱하듯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패널을 다시 봤다. 아직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위치 정보가 화면에 깜빡이고 있었다. 저 정보를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반드시!
나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림자 사냥꾼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절박한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코드명: 그림자… 그들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다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나는 비로소 새로운 목적지를 찾은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망각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 나를 기다리는 위험이 무엇이든,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나는 발톱을 피하며 벽에 놓인 낡은 철봉을 집어 들었다. 그림자 사냥꾼이 다시 나에게 덤벼들었다. 이 지하 연구실은 곧 나의 무덤이 될 수도, 아니면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도 있었다.
선택은 이제 내 손에 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