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계의 한 조각,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 지훈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와 녹슨 철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노을은 기이하게도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하늘은 탁한 회색과 진홍빛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상처처럼 보였고, 그 아래의 세상은 먼지와 정적만이 지배하는 죽은 무덤이었다.
“젠장… 오늘은 뭘 찾아야 하나.”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식량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손에 들린 몽둥이는 무기라기보다는 지팡이에 가까웠고,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등에 멘 낡은 배낭 속에는 빈 통조림 캔 몇 개와 녹슨 나이프, 그리고 정체 모를 고문서 조각이 전부였다. 그 고문서 조각은 그가 이 세계의 심연을 처음 엿본 곳에서 주운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문자와 불쾌한 도형들이 가득한 그것을, 그는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그 안에 이 모든 비극의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지훈은 한때 거대한 쇼핑몰이었을 법한 건물의 입구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유리문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내부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기가 풍겨 나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무것도 없겠지. 늘 그랬듯이.”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기대는 사치였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절망 속에서 다음 절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희미한 잔광이 비추는 텅 빈 상점들이 늘어섰다. 마네킹들은 기괴하게 부서진 채 비틀려 있었고, 핏자국처럼 번진 곰팡이가 벽을 뒤덮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훈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몽둥이를 고쳐 쥐고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뼈가 비틀리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끔찍했다. 거대한 벌레가 딱딱한 껍질을 비비는 소리 같기도 했고, 죽어가는 육체가 바닥을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숨을 죽이고 어둠을 응시했다. 빛이 닿지 않는 저 너머에서, 검고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짐승이라기보다… 어떤 육체가 뒤틀리고 뭉쳐서 만들어진 덩어리에 가까웠다. 척추가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다리는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검은 덩어리 위로 수많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들은 별자리를 이룬 것처럼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고, 멍하니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것은… ‘놈들’이었다. 재앙이 세상을 뒤덮은 이후, 밤의 그림자 속에서, 혹은 폐허의 심연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존재들. 그것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덩어리 중앙에 박힌 수많은 눈동자 중 하나가, 정확히 지훈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덩어리에서, 마치 수많은 목구멍이 동시에 벌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지만, 비명이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음파였다. 그 소리는 지훈의 고막을 찢고 뇌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이성을 잠식하려 들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머릿속에서 온갖 환각이 스쳐 지나갔다. 녹슨 철근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보였고, 벽의 곰팡이가 피와 살덩이로 변하는 듯했다.
지훈은 이성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안 돼… 미치면 안 돼…!” 그는 자신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정신은 거대한 균열을 얻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저것은 그저 형태만 기괴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 현실을 왜곡하고, 보는 이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무언가’였다.
그 검은 덩어리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지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다리들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살아야 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숨 쉬고 싶었다.
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고, 복도 끝의 비상구 문을 향해 내달렸다. 몽둥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일으키는 소음조차 공포에 묻혀버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한 칸 한 칸 발을 헛디딜까 공포에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쇼핑몰 안에서 들리던 끔찍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 소리가 그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 것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결국, 그는 1층의 비상구 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폐허의 잔해가 가득한 거리로 나온 지훈은 숨을 헐떡였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놈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고,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근처의 버려진 버스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녹슨 철제 의자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밤하늘은 여전히 붉은색과 회색이 뒤섞인 기이한 색을 띠고 있었고, 저 멀리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에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끝자락에서 온 존재가 이 세계의 심장을 움켜쥔 듯한 모습이었다.
지훈은 배낭을 끌어당겨 고문서 조각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알 수 없는 문자를 더듬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이 이 문서, 혹은 이 문서가 가리키는 어떤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존재들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곳에 있었고, 인간은 그저 그 거대한 존재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비참하게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오늘도… 살아남았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곧 울음이 되었다. 공포와 피로,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비통한 울음이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일 밤 지옥 같은 꿈에서 깨어나 다음 날의 지옥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쳐버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버스의 차가운 철판에 등을 기댄 채,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검은 덩어리의 불가능한 형태와 수많은 눈동자, 그리고 그 끔찍한 비명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태양이 뜬다면(설령 그것이 더 이상 태양이 아닐지라도), 그는 다시 배낭을 메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 황폐해진 세계 속에서, 다음 식량을 찾고, 다음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단 하루라도 더.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오거나,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리는 날이 오기 전까지.
그것이, 지훈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