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균열의 시작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와 소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변북로의 불빛은 희미한 주황색 띠를 이루며 바쁘게 움직였지만, 30층 높이의 이 아파트에서는 그 모든 것이 먼 풍경화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밤 11시, 이서준은 작업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감은 이틀 뒤. 진도는 반도 나가지 못했다.

“젠장, 진짜 안 그려지네.”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라면 그릇과 몇 권의 스케치북이 어지럽게 놓인 책상 위에는 아이패드와 디지털 펜만이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서준은 웹툰 작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은 그를 늘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스케치도, 선화도, 채색도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심장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게 뛰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움직여야 굳은 생각이 풀릴 것 같았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발끝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충전 케이블을 툭 밀어냈다.

타닥.

거실 불빛이 한순간 깜빡였다. 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이러네.”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반년. 가끔 전기가 불안정한지 거실 조명이 깜빡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관리실에 연락했지만, 기사님은 올 때마다 “전압은 정상인데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딸깍.

현관문 쪽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그는 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밤이 깊어지면 이런저런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법이었다. 아니면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들린 소리가 울려서 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별거 아니겠지.”

서준은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의 도시 불빛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집중은 깨진 뒤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서준은 겨우 작업에 다시 몰두하고 있었다. 펜촉이 액정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드디어 몰입이 시작되려는 찰나, 또다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쪽이었다.

슥, 삭.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서준은 펜을 든 채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거실 바닥에 러그를 깔아두었다. 그 위를 발로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윗집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나 쿵쿵거리는 소리는 익숙했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거실로 향했다. 불이 꺼진 거실은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러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도 제자리에 있었고, 작은 협탁 위의 물건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 쪽으로 다시 가보았다.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밤늦게까지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부쩍 외로움을 타고,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서준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다시 작업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악!”

놀란 서준은 몸을 홱 돌렸다. 소리는 주방 쪽이었다. 심장이 발끝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불을 켜자 하얀 타일 바닥 위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냉장고 자석이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자석. 그가 이사 오면서 제일 처음 붙여둔 것이었다. 작은 자석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을 뿐인데, 왜 이리 심장이 요동치는 걸까. 그는 자석을 주워 다시 냉장고에 붙였다. 꽤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떨어질 리가 없는데.’ 그는 의아했지만, 어쩌면 제대로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점점 더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밤마다 잦아지는 이상한 현상들 때문이었다.
작업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면 문은 굳게 닫혀 있거나,
거실 TV가 저절로 켜져 지직거리는 화면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거울에 습기가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위에 작고 흐릿한 손자국이 찍혀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해서’, ‘전기 문제겠지’, ‘이사 오면서 먼지가 많아서’,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같은 이유를 찾아내며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며칠 후, 새벽 3시.
서준은 잠결에 이상한 한기를 느꼈다. 덮고 있던 이불이 발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느껴졌다. 마치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떼자, 차가웠던 부분은 이내 온기를 되찾았다.

“뭐지?”

그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침대 발치 쪽에서 무언가 톡, 하고 이불을 건드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작은 아이의 손가락 같은. 서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데, 이번에는 베개 밑에서 희미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오래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

‘내 상상일 거야. 피곤해서 그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의 머리맡에서.
결국 서준은 공포에 질린 채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정체 모를 옅은 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의 베개 옆, 침대 헤드보드 위에 얹혀진 작은 사진 액자에서 나는 빛이었다. 그가 어머니가 사주셨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었던 유년 시절의 사진이었다. 조명이 꺼진 방 안에서 사진이 미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서준은 공포에 질려 사진 액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액자에 닿는 순간, 사진 속 풍경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흑백 사진이었던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선명한 색감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그의 방은, 그 찰나에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높은 천장과 깔끔한 벽 대신, 낡은 나무 서까래와 얼룩진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침대는 사라지고, 대신 낡고 거친 천이 덮인 온돌방의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야경 대신, 어둑한 시골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게… 뭐야?”

서준은 자신이 방금까지 누워있던 침대를 더듬었다. 푹신했던 매트리스 대신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손끝에 닿는 이불은 얇고 거친 면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은 환각일 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피로에 지친 뇌가 만들어낸 착각.

서준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방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익숙한 벽지, 모던한 가구, 창밖의 도시 야경.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광란하듯 뛰고 있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끈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다시 평범한 흑백 사진이었다.
그러나 액자 뒷면을 만지는 순간,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액자를 뒤집자, 사진 뒤에 웬 낯선 물건이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작고 낡은 놋쇠로 된 열쇠였다. 빛바랜 천이 열쇠 고리처럼 감겨 있었고, 그 천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분명 이런 것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이 열쇠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서준은 열쇠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은, 단순한 착각이나 전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작은 열쇠가, 이 모든 기이함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열쇠를 꽉 쥐었다. 열쇠에서는 묘하게도 차가운 금속의 감촉 외에,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오래도록 쥐여져 있었던 것처럼.
밤은 그렇게, 섬뜩한 정적 속에서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