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숨을 고르며 폐허가 된 빌딩의 잔해를 밟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먼지가 마스크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졌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고,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잔해는 거대한 무덤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이제는 ‘도시’라는 이름조차 어색한, 그저 거대한 철과 콘크리트의 시체.

손에 쥔 나이프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은 희미한 빛에도 섬뜩하게 반짝였다. 이 칼이 내 유일한 친구였다. 아니,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믿음 따위는 오래 전에 불타 재가 되어버렸다.

발치에는 썩어가는 덩굴이 콘크리트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그 덩굴 사이로 희미한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축축해진 진흙 위에 찍힌 흔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적어도 열 명 이상. 녀석은 여전히 그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류선우.”

목구멍 속에서 긁히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과 함께 가장 자주 부르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 석 자가 이제는 독약처럼 쓰렸다. 과거의 기억이 날카로운 조각칼처럼 심장을 찢어 발겼다. 웃고 떠들던 순간들, 서로의 등을 맡기며 살아남았던 나날들, 그리고…

*쾅!*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정적을 깨고 허공을 갈랐다. 빌딩 잔해 저편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저것은… 수류탄인가? 아니, 저 정도 위력이라면 개조된 지뢰일 가능성이 높다. 목표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심장이 무자비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거대한 굶주림이었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삭막한 바람이 폐허 사이를 휘돌며 기괴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수많은 유령들이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그 속삭임을 무시하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 나아갔다. 내 어깨에 맨 개조된 석궁이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화살통에는 특수 제작된 화살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일반적인 금속 화살이 아니었다. 독액을 바르고 끝을 불꽃으로 달군,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응축해 놓은 듯한 화살들이었다.

계단을 올랐다. 철근이 드러난 콘크리트 계단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무게를 실었다. 층계참에 이르자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인기척을 죽이고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젠장, 또 돌연변이야? 씨발, 끝이 없네!”

거친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칼이 살을 가르는 소리, 뼈가 부러지는 소리.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들은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류선우의 부하들임이 틀림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좁은 복도에 세 명의 남자가 웅크린 채 거대한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그림자의 정체는 ‘살덩이’였다. 종말 이후 생겨난 역겨운 변이 생물 중 하나로, 피부가 벗겨진 채 근육과 살점만으로 이루어져 기형적으로 커진 팔다리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었다. 그 녀석들은 사람을 발견하면 무조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류선우의 부하들은 개조된 소총과 날붙이로 살덩이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덩이는 이미 두 명의 부하를 집어삼킨 후였다. 남은 한 명은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며 총을 난사했다. 헛발질이었다. 탄환은 살덩이의 두꺼운 살점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흐읍…”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놈들이 나에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조용히, 그림자처럼 움직여 그들 뒤로 다가섰다. 살덩이가 마지막 남은 생존자를 향해 촉수 같은 팔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크아아악!”

살덩이의 뒷목에 나이프를 깊숙이 꽂아 넣었다. 끈적한 피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녀석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다. 나는 힘껏 나이프를 돌려 녀석의 신경을 끊어버렸다. 거대한 몸체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부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공포와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살덩이의 위협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의 눈동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누구, 누구세요?”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냉기.

“여… 여기에, 류선우 님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당신, 당신도 혹시…!”

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남자는 뒷걸음질 쳤다. 그는 내 눈을 보며 직감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류선우가 어딨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마치 얼음 조각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 그는… 10층… 10층에서… 회의 중입니다… 자원… 자원 분배 문제로… 으읍!”

그의 목소리가 끊겼다. 나는 그의 목에 날카로운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저항할 틈도 주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생존자들은 서로에게 너무나도 잔인했고, 죽음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이었다.

죽어가는 그의 눈동자가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내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은 공포가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허탈감이었다. 마치 자신도 언젠가 이렇게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핏자국을 닦아냈다. 나이프는 언제나처럼 매끄럽게 피를 흘려보냈다. 나는 그의 품을 뒤졌다. 자원 분배라면 분명 귀중한 정보가 있을 것이다. 역시나, 낡은 종이 한 장과 함께 작은 휴대용 단말기가 나왔다. 종이에는 불분명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단말기에는 암호화된 메시지들이 몇 개 있었다. 류선우가 머무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단서였다.

단말기를 주머니에 넣고, 지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10층. 건물 구조와 지도를 대조하니, 류선우가 머무는 곳은 이 건물에서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곳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가장 고립된 곳. 완벽했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층, 또 한 층.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고동쳤다. 이것은 흥분이었다. 지난 몇 년간, 내 안에 고여 있던 증오와 분노가 드디어 폭발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8층에 이르자 희미하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류선우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과거에는 그렇게나 정겨웠던 목소리가 이제는 끔찍한 악몽처럼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떨어뜨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내가 발버둥 칠 때 비웃었던 목소리였다.

“하진아, 미안하다. 이건… 모두를 위해서야.”

그때, 너는 그렇게 말했다. 불타는 폐허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잔해 더미 아래에서, 내가 마지막 힘을 다해 너를 불렀을 때, 너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 네 등에 칼을 맞고,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나는 너를 이해하려고 했다. 너의 선택을 납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은 나는 깨달았다. 너는 그저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뿐이라는 것을. 너의 안위를 위해, 너의 생존을 위해.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너는 죽을 것이다.

9층을 지났다. 목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술잔을 기울이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살아남음’을 즐기고 있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생존이었다. 나는 매 순간 죽음과 싸웠고, 그들은…

손에 쥔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석궁의 시위를 점검했다. 특수 화살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류선우, 너의 심장을 관통할 화살.

10층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철문 너머에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제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자원 분배에 대해 논의해볼까요? 이번에 우리가 확보한 식량은….”

류선우의 목소리였다. 여유롭고 능글맞은, 그리고 그만큼이나 역겨운 목소리.

나는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한껏 긴장했다. 피 냄새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저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역겨운 냄새들이 뒤섞여 있었다.

나의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너의 지옥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철문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그 틈새로 환한 불빛과 함께 류선우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선우야. 드디어 만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