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낡고 축축한 공기, 수백 년은 족히 묵었을 먼지 냄새가 폐부를 짓눌렀다. 시진은 마나석을 든 손을 살짝 떨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뻗어 나가는 길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식도처럼 좁고 구불거렸다.
“젠장, 끝이 있기는 한 거야, 엘리시아?”
시진의 투덜거림에도 엘리시아는 묵묵히 전방을 주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양이 같았다. 고대 문명의 유적 깊숙한 곳,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통로를 헤쳐 나가는 일은 늘 정신을 갉아먹었다.
“고대의 기록은 틀리지 않아요. ‘시작의 문’은 언제나 가장 깊은 곳, 가장 어두운 곳에 잠들어 있다고 했으니까.”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옅은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그녀조차도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호들과 희미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마나석의 빛만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세계로 넘어온 지 햇수로 3년. 평범한 대학생이던 그는 이제 어엿한 모험가, 혹은 발굴가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었다. 이 낡은 유적에서 그가 찾던 것은 ‘고대의 힘’에 대한 단서였다. 어쩌면 그 힘은 그를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그때였다. 좁은 통로가 거짓말처럼 탁 트이며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시에, 시진의 심장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태엽이 풀린 시계추처럼, 불규칙적이고 격렬하게.
“이게… 뭐야?”
마나석의 푸른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어둠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무언가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 존재 자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 공기조차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엘리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꽉 쥐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사방을 훑었다.
“마력의 흐름이… 미쳤어요. 우리가 알고 있던 어떤 마법 구조와도 달라요.”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듯,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모든 것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 같았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시진은 그 텅 빈 공간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에너지를 느꼈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압도적인 느낌이라니.”
시진이 제단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엘리시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 시진! 이 기운은… 위험해요. 기록에 따르면, 태초의 힘은 모든 것을 재구성하거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이건 우리가 찾던 ‘고대의 숨겨진 마법’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형태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에 시진은 발걸음을 멈췄다. 엘리시아는 보통 이런 식으로 경고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시진의 눈길은 여전히 제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고동쳤다.
‘설마, 이게 내 이세계 전이와도 관련이 있는 건가?’
그 순간, 제단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바닥의 거대한 원형 문양이 섬뜩한 붉은빛을 띠며 번뜩였다. 콰아아앙! 고대의 유적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윽!”
엘리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시진은 간신히 버티며 제단에 시선을 고정했다. 붉은빛은 단순한 마법 발동의 섬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피가 흐르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제단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제단 한가운데, 텅 비어 있던 공간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태고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그림자 같았다.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응축되어 지름 1미터 정도의 구체 형태로 변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듯한 혼돈의 우주가,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허무의 블랙홀이, 그리고 세상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담겨 있는 듯했다.
“태… 태고의 심장…!” 엘리시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시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제단에 다가갔다.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그의 모든 세포를 뒤흔들었다. 몸속의 마나가 미친 듯이 날뛰며 구체와 공명했다.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끌림. 이 힘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시진, 안 돼! 더 가까이 가지 마요! 제발!”
엘리시아의 절규가 귓가에 닿았지만, 시진은 이미 구체의 강력한 인력에 붙들린 듯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손이 저절로 뻗어 나갔다. 검고도 푸른, 혼돈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구체를 향해.
손끝이 구체에 닿으려는 찰나, 구체에서 한 줄기 검은 섬광이 뻗어 나와 시진의 이마를 강타했다.
“커헉!”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고통이 덮쳤다. 동시에 수많은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행성들이 부서지는 광경,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생명이 솟아나는 순간, 우주를 가득 메운 고대 존재들의 울부짖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에 대한 잔혹한 환영이었다.
환영 속에서, 시진은 거대한 검은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문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고, 그 심연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눈을 뜨고 있었다.
**쿵…! 쿵…! 쿵…!**
구체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거칠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 고동은 유적 전체를, 아니, 차원을 찢을 듯한 격렬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시진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마구잡이로 마력이 뿜어져 나왔고, 바닥의 붉은 문양은 이제 눈이 멀 정도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진! 정신 차려요!” 엘리시아가 기어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이 닿자 시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력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구체의 고동이 최고조에 달하자, 유적의 낡은 천장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찢어지기 시작했다. 검은 균열이 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균열 너머로는 어둠 속에 잠긴, 다른 차원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거대한 그림자들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모습.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차갑고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동공은 시진과 엘리시아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수억 년의 시간 속에서 잠들어 있던 존재가, 이제 막 깨어난 듯한.
“맙소사… 이건…!”
엘리시아의 경악 어린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균열이 더욱 거칠게 벌어졌다. 공간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눈동자가 드리운 그림자가, 유적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형상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온 우주가 붕괴할 것 같은 압도적인 공포가 시진의 심장을 옥죄었다.
이것이…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진정한 모습인가?
아니면, 그저 시작에 불과한 것일까?
시진은 눈앞의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이미 자신의 이세계 생활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니, 무언가가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시진은 자신이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차가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심연의 존재가, 깨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