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서울의 밤, 낡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세련된 회색빛 고층 아파트 단지가 묵묵히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지영은 그중에서도 꽤 높은 12층, 1208호에 살았다. 햇빛은 잘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은 늘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사 온 지 한 달째, 지영은 밤마다 들려오는 소음에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니까.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 소리려니,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려니. 그렇게 넘겼다.
어느 날 새벽, 잠결에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눈을 비비며 액정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알림도 와 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핸드폰이 침대 아래, 저 멀리 책상 다리 옆에 떨어져 있었다.
“어젯밤에 내가 잠결에 밀쳤나?”
지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지영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분명히 어제 보던 드라마가 재생되어야 할 시간이었는데, 화면에는 아무 채널도 잡히지 않은 채 지직거리는 노이즈만 가득했다. 채널을 돌려봐도, 전원을 껐다 켜봐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고장났나?”
한숨을 쉬며 리모컨을 내려놓는데, 순간 거실 저 안쪽, 부엌에서 ‘딸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부엌 불은 꺼져 있었다.
“누구세요?”
말을 내뱉고 나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인데 누구냐니. 지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설거지해둔 머그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식탁 가운데로 밀려난 듯한 수저통이 있었다. 수저통 안의 젓가락 몇 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지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어젯밤에 내가 잘못 놨나? 아니, 그럴 리가….”
머릿속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지만, 등골은 이미 서늘했다. 지영은 서둘러 수저통을 제자리에 놓고 머그컵을 싱크대 안으로 옮겼다. 괜히 불안한 마음에 부엌의 모든 서랍과 찬장을 한 번씩 열어보고 닫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밤이 되자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벽 틈새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멀리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까지도 이상하게 들렸다.
자정을 넘긴 시각,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영은 몸을 움츠렸다. 분명히 거실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둠 속 거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을 억누르며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스탠드 조명이었다. 꽤 묵직한 금속 스탠드였다. 넘어질 리 없는 조명이었다.
“뭐야, 이거….”
지영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귀신? 도둑? 아니, 도둑이라면 왜 저걸 넘어뜨리고 아무것도 훔쳐 가지 않았지?
그날 밤, 지영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마자 지영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희 집에 이상한 일 없어? 막, 물건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든가….”
“무슨 소리야? 너 피곤해서 헛것 보는 거 아니야?”
“아니! 진짜야! 어제는 스탠드가 넘어졌어. 아무도 없었는데!”
“누가 장난치는 거 아닐까? 아님 네가 잠결에 그랬거나.”
“아니라니까! 나 진짜 무서워 죽겠어.”
“그럼 일단 집을 좀 비워봐. 주말에 우리 집에서 자든지. 기분 탓일 수도 있잖아.”
친구의 말이 일리는 있었지만, 지영은 이미 합리적인 설명을 찾을 여력을 잃은 상태였다. 퇴근 후, 지영은 아파트로 돌아오는 대신 친구 집으로 향했다. 이틀 밤을 친구 집에서 보냈다. 친구의 편안하고 따뜻한 집에서 지영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야.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영의 안일한 생각은 아파트로 돌아온 첫날밤에 산산조각 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난방을 껐는데도 유난히 추웠다.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침대 위에 놓여있던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베개 위에는, 지영이 며칠 전 잃어버렸던 립스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영은 소름이 돋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거실에서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작은 돌멩이들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영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다. 손이 덜덜 떨렸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에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지영이 즐겨 마시는 차를 우릴 때 쓰는 유리컵이 놓여 있었는데, 그 컵이 스스로 탁자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지영은 숨을 멈췄다. 컵은 탁자 끝까지 가더니,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순간, 지영의 뒤편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희미해서 바람 소리처럼 들렸지만,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영의 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영은 미친 듯이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가려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분명히 잠그지 않았는데! 그녀는 손잡이를 비틀고 발로 문을 걷어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열어! 열라고!”
절규하는 지영의 등 뒤에서, 아파트 내부의 모든 불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복도에서 들어오던 희미한 빛마저 사라졌다. 지영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들려왔다.
거실에서, 부엌에서, 침실에서, 그리고 발치에서.
물건들이 쿵, 쾅, 와장창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모든 서랍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창문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마치 집 안의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소음이, 그녀의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그 소음의 한가운데서, 지영은 다시 그 속삭임을 들었다.
“가지 마….”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하게,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섬뜩한 울림이었다.
지영은 눈을 감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집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이 집의 진짜 주인은, 지금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그날 밤, 아파트 12층 1208호에서는 새벽 내내 기괴한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위아래층 주민들은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1208호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의 모든 것은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지영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니, 마치, 누군가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것처럼.
그녀의 립스틱은 여전히 침대 바닥에 떨어진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뒤집혀 부서진 그 집 안에서, 차가운 공기 속에 스며든 희미한 속삭임이 메아리쳤다.
“보고 싶었어….”
“가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