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해 속의 그림자
바스러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진우는 허리를 숙여 낡은 기둥 뒤편에 바짝 붙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제는 익숙한 냄새였다. 손전등 빛이 어둠을 가르고 희미하게 앞을 비췄다. 한때 화려한 색깔로 빛났을 백화점의 내부였지만, 이제는 부서진 진열대와 뒤틀린 철골만이 앙상하게 남은 폐허에 불과했다.
“진우 오빠, 여기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요?”
등 뒤에서 속삭이는 세라의 목소리에 진우는 고개만 살짝 돌렸다. 세라는 진우가 등에 멘 배낭의 어깨 끈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공포와 기대가 뒤섞인, 생존자 특유의 눈빛이었다.
“있어야지. 없으면 죽는 거고.”
진우는 짧게 대답하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의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었다. 지난 몇 년간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이기도 했다. 매번 위험을 무릅쓰고 폐허를 뒤져 식량과 물을 찾아야 했다.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숨죽여 도사리고 있는 ‘그것들’의 영역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번 목적지는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던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폐허가 된 지 오래라 위험하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생존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어쩌면 그들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귀한 보급품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쪽으로 가봐. 지하 푸드코트 쪽은 완전히 무너진 것 같고, 여긴… 옛날에 식료품 팔던 층이었던 것 같은데.”
진우는 손전등을 위층으로 향했다. 비상 계단은 겨우 형태만 남아있었지만, 아직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삐걱거리는 철제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밟았다.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세라는 움찔거렸다. 그 소리가 어딘가에 숨어있는 ‘그것들’을 불러낼까 두려운 표정이었다.
간신히 위층에 다다르자,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한때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먼지 쌓인 계산대, 찢어진 상품 포장지, 깨진 유리 파편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좋아, 이제 좀 찾아보자. 유통기한 따질 때가 아니야. 뭐든 먹을 수 있는 거면 돼.”
그가 말했다. 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우의 옆에 바싹 붙었다. 둘은 조심스럽게 흩어져 통조림이나 오래된 가공식품이 있을 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한쪽 구석에서 기울어진 진열장을 발견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찌그러진 통조림 몇 개가 먼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세라, 여기!”
그가 흥분하여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세라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멀지 않은 곳에서 ‘타악!’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유리병이 깨지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즉시 몸을 낮추고 손전등을 껐다. 세상은 다시 완벽한 암흑에 잠겼다. 세라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세라! 괜찮아?”
그가 속삭였다. 반응이 없었다.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둠 속을 더듬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는 보통의 ‘그것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보통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멀리서 아주 희미한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동시에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이 찢어진 천을 스치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진우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것은 ‘그림자 사냥꾼’들의 소리였다. 빛을 흡수하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공포에 질린 먹잇감의 심장 소리마저 찾아내는 저주받은 존재들.
“세라… 어디 있어!”
진우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듯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점이 번뜩였다.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 진열대 사이에서였다. 그 붉은 점은 마치 맹수의 눈처럼 어둠을 꿰뚫고 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세라가 위험했다. 그는 붉은 눈이 있는 방향이 아닌, 반대쪽으로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넘어지고 부딪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세라를 찾아야 했다.
그 순간, 붉은 눈이 있던 자리에서 그림자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에 그의 옆으로 다가오는 섬뜩한 기운.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크윽!”
진우는 본능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챙!’ 하는 끔찍한 금속음이 울렸다. 쇠파이프가 그림자 형체에 부딪혔지만, 마치 허공을 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철 파이프가 미끄러지듯 그림자를 통과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충격으로 인해 그림자는 움찔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진우는 손전등을 켰다. 빛이 터져 나오자, 검은 연기처럼 일렁이는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뼈만 남은 듯한 팔, 흐릿하게 빛나는 붉은 눈, 그리고 형체 전체에서 풍기는 얼음장 같은 냉기. 그것은 분명 ‘그림자 사냥꾼’이었다.
“세라!”
진우는 다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그림자 사냥꾼은 잠시 빛에 움찔하는 듯하더니, 이내 적응한 듯 붉은 눈을 번뜩이며 진우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것의 움직임은 비현실적으로 빨랐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쇠파이프를 들고 휘두르며 시간을 벌었다. 부서진 진열대를 넘어뜨려 간신히 그림자의 진로를 방해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때, 희미한 빛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전등 빛이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깜빡이는 불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세라가 떨리는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는 깨진 유리병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가 넘어지면서 병을 깬 것이었다.
“진우 오빠…!”
세라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진우를 쫓던 그림자 사냥꾼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붉은 눈이 세라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탐욕스러운 기운에 진우는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 사냥꾼은 먹잇감을 바꾼 듯, 순식간에 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
진우는 절규하며 몸을 날렸다. 그림자 사냥꾼이 세라에게 닿기 직전, 그는 온몸을 던져 세라를 밀쳐냈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가운 그림자의 발톱이 그의 등을 찢고 지나갔다.
“크아악!”
등줄기를 찢는 듯한 고통이 진우의 온몸을 덮쳤다. 그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림자 사냥꾼은 진우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세라를 향해 돌아섰다. 상처를 입은 진우는 이제 쉬운 먹잇감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세라가 더 매력적인 목표였다.
“도망쳐, 세라! 도망치라고!”
진우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세라는 공포에 질려 얼어붙어 있었다. 그림자 사냥꾼이 그녀에게 다가가는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진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등에서 솟구치는 통증이 그의 몸을 마비시켰다.
세라가 흐느꼈다. 그림자 사냥꾼의 그림자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붉은 눈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번뜩였다. 그 순간, 세라의 손에서 손전등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가 발로 차 날린 작은 금속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던 가스레인지 부품에 부딪혔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멈칫했다. 그림자 사냥꾼의 붉은 눈이 순간적으로 다른 곳을 향했다. 가스레인지 부품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가스’ 냄새에 반응하는 듯했다. 그것은 썩은 고기나 피 냄새를 좋아했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화학적인 냄새에도 미약하게 반응하는 습성이 있었다.
이때다! 진우는 죽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등에선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쇠파이프를 움켜쥐고 그림자 사냥꾼의 측면을 향해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꺼져!!!!”
‘콰아아앙!’
이번에는 쇠파이프가 그림자 사냥꾼의 형체를 꿰뚫고 지나가는 대신,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림자 사냥꾼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붉은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라! 지금이야! 도망쳐!”
세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재빨리 진우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진우의 팔을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오빠, 괜찮아요? 피… 피가 너무 많이 나요!”
“닥치고 뛰어!”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뒤에서는 그림자 사냥꾼의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더욱 격렬해지며 그들을 쫓았다. 찢어진 등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한 고통에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간신히 비상구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왔을 때, 쇼핑몰의 거대한 홀에서는 이미 수십 개의 붉은 눈들이 동시에 번뜩이고 있었다. 진우와 세라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곳은, 거대한 ‘그림자 사냥꾼’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진우와 세라를 향했다. 그들은 꼼짝없이 갇힌 쥐 신세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진우는 쇠파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세라는 그의 등 뒤에서 흐느꼈다.
“젠장….”
진우의 눈앞이 아찔했다. 저 수많은 그림자들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들의 앞에는 어둠과 붉은 눈들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는, 그들을 쫓아온 거대한 그림자 사냥꾼 하나가 막 비상구 문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피할 곳은, 더 이상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