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아는 오늘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내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도시의 밤은 늘 시끄러웠지만, 그녀의 두 귀에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만이 가득했다. 번잡한 인파 속을 헤치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때쯤,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지아의 작은 원룸 아파트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바닥에 놓인 가방, 주방 식탁 위엔 어제 먹다 남긴 토스트 부스러기. 완벽한 지아만의 공간이자, 완벽하게 지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였다. 지아는 무거운 어깨를 한숨과 함께 축 늘어뜨렸다. 따뜻한 물에 샤워나 하고 바로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욕실로 향하던 지아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을 훑었다. 늘 제자리를 지키던 액자 하나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탓에 눈이 이상한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자기가 청소하면서 건드렸을 수도 있겠지.

다음 날 아침, 지아는 알람 소리에 간신히 눈을 떴다. 침대에서 비척이며 일어나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어젯밤 분명 식탁 위에 그대로 두었던 토스트 부스러기는 온데간데없었고, 말라붙은 접시와 컵은 깨끗하게 씻겨 물 빠짐 그릇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게다가 컵 옆에는 지아가 즐겨 마시는 허브티 한 봉지가 예쁘게 뜯어져 놓여 있었다.

“내가… 잠결에 설거지를 했던가?”
지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잠이 많고 게으른 편이었다. 어젯밤 피곤에 절어 샤워만 겨우 하고 쓰러져 잠들었던 것을 선명히 기억했다. 이런 완벽한 설거지는 꿈에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날 이후, 기묘한 일들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널어놓은 빨래가 건조대에서 깔끔하게 개켜져 서랍장 위에 놓여 있었다. 색깔별, 종류별로 분리된 수건과 옷가지들은 지아보다 훨씬 정돈된 모습이었다.
또 어느 날은 한참 찾던 리모컨이 아무도 올려놓지 않은 책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주변에는 지아가 무심코 늘어놓았던 잡동사니들이 예쁘게 정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다이어리까지 활짝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연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아는 처음에는 혹시 도둑이 들었나 싶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사라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깨끗해지고, 더 정돈된 상태였다. 그녀는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스릴러라기엔, 너무나도… 친절했다.

“누구세요? 혹시… 이 집에 사람이 더 사나요?”
지아는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 한가운데 서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론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어제 책상 위에 펼쳐두고 잠시 외출했던 책이 다른 페이지로 넘어간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는데, 연필로 삐뚤빼뚤하게 ‘힘내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지아는 멍하니 포스트잇을 바라봤다. 섬뜩하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따라 회사에서 상사에게 깨지고, 동료와 사소한 말다툼까지 했던 터라 기분이 최악이었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이 정체불명의 존재가 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고 위로를 건넬 줄이야.

그때부터 지아는 그 존재를 ‘친구’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붙여주면 어쩐지 더 친밀해질 것 같았다.
“친구야, 고마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다이어리 안에 붙였다.

이제 지아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늘 삐뚤어져 있던 거울이 바르게 맞춰져 있었고, 어질러진 화장대 위 화장품들은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었다. 때로는 바쁜 아침, 식탁 위에 갓 내린 따뜻한 커피가 놓여 있기도 했다. 누가 마중이라도 나온 듯,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비 오는 주말 오후였다. 지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감기 몸살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축 처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뜨거운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쨍그랑,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렸다. 지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작은 오르골이 저절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맑고 청량한 멜로디가 조용하고 축 처진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곧이어, 텅 비어 있던 머그컵 안에 따뜻한 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지아가 가장 좋아하는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지아는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이렇게나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

“친구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지아는 작게 흐느끼며 말했다. 오르골은 여전히 잔잔한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머그컵 안으로 톡, 하고 떨어졌다.

그날 이후, 지아는 더 이상 자신의 아파트가 외로운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다정하게 그녀의 일상에 스며든 이 특별한 존재 덕분에 그녀의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졌다. 거실에 놓인 화분에서는 계절에 맞지 않는 작은 꽃이 피어나곤 했고, 지아가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날이면 볼륨이 아주 미세하게 커져 있기도 했다.

지아는 이제 집에 들어설 때마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크게 인사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친구’를 향해 웃어 보였다. 도시의 회색빛 건물들 속, 조용하고 평범했던 그녀의 아파트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이제, 매일매일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