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낡은 시계와 수상한 손님

내 이름은 이솔.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에, 나는 서울의 한적한 골목길 어딘가에 박힌 ‘시간의 흔적’이라는 낡은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망가진 시계, 빛바랜 앤티크 가구, 이름 모를 누군가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한데 뒤섞여 어수선하면서도 아늑한 공간. 이곳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피난처였다. 적어도,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자식은 또 왜 이러는 거야….”

오후 세 시.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가게 안으로 길게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 나는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친 채 19세기 영국에서 건너왔다는 탁상시계와 씨름 중이었다. 어제부터 태엽이 엉켜 꼼짝도 하지 않는 고물 덩어리. 나는 섬세한 핀셋으로 시계의 복잡한 내부를 건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내 연애사도 이 시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째깍째깍 잘 돌아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태엽이 엉키고 부품 하나가 어긋나버리는 식이었다. 결국엔 멈춰 버리는 거지. 그 흔적들만 덩그러니 남아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이번엔 고작 3개월이었다. “솔아, 너는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 전 남자친구의 이별 통보는 마치 시계의 추가 갑자기 뚝 떨어져 버리는 소리처럼 명료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니. 고작 ‘이름 모를 존재와의 운명적인 사랑’을 꿈꿨을 뿐인데.

“젠장, 대체 뭐가 문제인데!”

짜증이 치밀어 핀셋을 놓으려던 찰나, 맑은 종소리가 띠링 울렸다. 가게 문이 열린 것이다. 이런 한적한 시간에 손님이 오다니 드문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돋보기를 벗고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심장이 탁상시계의 태엽처럼 엉켜버렸다.

가게 문가에 서 있는 남자. 그는 마치 다른 차원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비현실적인 존재였다. 검은색 코트와 그보다 더 어두운 머리카락, 그리고 서늘하도록 완벽한 이목구비.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윤곽을 부드럽게 감쌌지만, 그의 눈빛은 어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 같았다. 언뜻 보면 평범한 흑색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것도 같고, 또 어떤 각도에서는 옅은 금색이 스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색이었다.

“어서 오세요.”

애써 침착한 척 인사를 건넸지만, 내 목소리는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게. 그의 시선은 가게 안을 천천히 훑었다. 낡은 물건들이 가득한 이 공간을, 그는 마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보물 상자를 발견한 듯이 신중하게 응시했다.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핀셋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도 잊었다. 칠흑 같던 그의 눈동자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오래된 숲의 새벽 안개 같은 신비로운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낮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그러나 놀랍도록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오래된 시간을 품은 물건들을 찾고 있습니다.”

식상한 대답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서 잔향처럼 길게 남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희 가게에 없는 건 없죠. 특히 오래된 물건이라면요. 어떤 종류를 찾으시는지… 혹시 특정 시대를 염두에 두신 게 있으신가요?”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움직임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특정 시대라… 모든 시대의 시간을 다루고 싶습니다.”

‘뭐야, 이 남자. 시인인가?’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어딘가 모르게 장난기가 느껴지는 내 연애관과는 거리가 먼, 심각한 분위기였다.

“어… 그럼 이쪽으로 한번 보시죠. 이 시계는 18세기 프랑스 루이 15세 시대의 걸작인데요…” 내가 그에게 멈춰있던 탁상시계를 가리키며 설명하려 하자, 그가 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 시계는… 지금 상심했군요.”

엉뚱한 말이었다. 내 손목을 감싸는 그의 손가락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그러나 그 차가움이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맑고 깨끗한 얼음 결정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놀라 내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시선이 워낙 강렬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상심이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태엽이 엉켜서 멈춘 건데요.”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얼어붙은 호수에 햇빛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닙니다. 이 시계는 스스로 멈추기를 택했습니다. 더 이상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내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돌려 가게 안쪽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를 응시했다. 묵직한 추가 매달려 있는 그 시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이 가게를 처음 열었을 때부터 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저 시계는… 언제부터 멈춰 있었죠?”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호기심이 묻어났다.

“저건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멈춰 있었어요. 할아버지 말로는, 중요한 순간에 스스로 멈췄다고 하던데요. 뭐, 고치려는 시도는 수없이 했지만, 안 되더라고요.”

그가 천천히 괘종시계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그가 풍기는 낯선 향기에 매료되었다. 흙과 이끼, 그리고 어딘가 깊은 밤의 공기 같은, 자연의 신비로운 냄새였다.

그는 괘종시계 앞에 섰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의 손이 낡은 시계의 나무 몸통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시계 바늘이 멈춰 선 유리창에 닿았다. 11시 59분 59초. 자정에 멈춰 선 시간이었다.

“이것은… 이 세계의 시간이 아닙니다.”

그의 말이 내 머릿속을 쾅 하고 울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계의 시간이 아니라니?
그는 손가락을 유리창에서 떼어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깊어 보였다. 마치 그 안에 수천 년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이 시계는… 이 땅의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저와 같은 이들이 이곳에 발을 디딜 때, 그들이 가져온 마지막 희망이었죠. 그들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왔으니, 이곳의 시간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멈췄습니다.”

내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저와 같은 이들이라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그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렸지만,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나는 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어딘가 슬픔이 깃든 미소였다. “찾아보니… 아직도 이곳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군요. 저는… 그것들을 찾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 그것들이요?”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네. 제 종족이 이곳에 남겨둔 시간의 흔적들. 그리고… 그들의 기억들.”

그의 말에, 내 불운한 연애사에 대한 모든 불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전율과 함께 미지의 공포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이 남자는 대체 뭐지? 그의 눈빛, 그의 말,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낯선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 시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습니다. 혹시… 제가 잠시 이 시계를 가져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괘종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단호한 힘이 느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 년간 멈춰있던, 고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시계. 그리고 그 앞에서 알 수 없는 종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남자.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 시계는 제가 반드시… 움직이게 만들겠습니다.”

그의 눈이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밤하늘이나 새벽 안개가 아니었다. 깊고 오랜 숲 속에서, 처음으로 빛을 마주한 요정의 눈빛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 속에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운명적인 사랑’의 그림자를 언뜻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금지된 사랑이라는 예감 또한 강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럼… 저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는 마치 바람처럼 조용히 돌아서서 가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그는 사라졌고, 나는 여전히 멈춰 선 괘종시계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내 손목을 스쳤던 차가운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마주한 것은, 과연 나의 지긋지긋한 연애사를 끝내줄 운명적인 사랑일까. 아니면, 이 세상의 모든 시계를 멈춰버릴 재앙의 시작일까.

내 심장은, 멈춰있던 그 괘종시계처럼, 다시는 전처럼 째깍거리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째깍거리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